<테마특강> 첨단 수치예보의 세계

이우진

◇81년 연세대학교 대기과학과 졸업

◇83년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과 석사

◇85∼86년 영국 기상청 수치예보과 파견근무

◇94년 미국 일리노이대학 대기과학 박사

◇83년∼현재 기상청 수치예보과장

 별의 운행이나 바닷물의 높낮이를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듯이 날씨도 예측할 수 있다. 20세기 초 영국의 기상학자 리처드슨도 이러한 결정론적 믿음에 기초해 오늘날 수치(數値)예보라 불리는 새로운 예보방법을 시도했다. 1922년 발간된 「수치적 과정에 의한 일기예측」에서는 단순한 덧셈·뺄셈만으로 대기운동을 예측할 수 있음을 보였다. 이 방법의 특징은 그 계산작업을 컴퓨터가 대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컴퓨터가 등장하기 훨씬 전이라서 6시간 동안의 유럽 날씨를 예보하는 데 무려 6만4천명이 동원되어 많은 양의 덧셈·뺄셈을 해야만 했다. 일기예보 전문가는 수많은 인간 계산기를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비유됐다.

 현재 진행중인 컴퓨터 기술의 발전 양상은 가히 폭발적이다. 시중에 시판되는 고급 퍼스널 컴퓨터는 과거 10년 전의 대형 컴퓨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자료를 처리한다. 주요 기상예측센터에서 운영하는 슈퍼컴퓨터는 초당 1백억번 이상의 연산을 처리하고 있다. 이런 속도로 나가면 2000년 초에 초당 수조 단위의 계산을 처리해내는 컴퓨터가 나온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영국 레딩시에 위치한 유럽 중기예측센터는 전세계 기상기관에서 가장 평판이 높은 일기예보를 매일 내는 유럽 공동출자 연구기관이다. 1백28개나 되는 첨단 전자두뇌(Computer Processor)들이 각각 맡고 있는 지역의 대기 방정식을 쉬지 않고 계산하고 있다. 리처드슨의 꿈은 이제 슈퍼컴퓨터의 전자 오케스트라로 환생한 셈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대기운동을 재현하거나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흔히 수치모델이라 부른다. 사이버 공간 속의 대기는 양파 껍질처럼 여러개의 층으로 나뉜다. 각 층이 다시 바둑판처럼 여러개의 작은 면적으로 분할되면 대기는 수많은 작은 상자로 재구성된다. 이 상자들은 컴퓨터가 분석할 수 있는 최소 단위로 상자 속의 공기들은 단일한 성질을 갖는 하나의 계산점이 된다. 컴퓨터가 분해할 수 있는 단위 상자의 체적이 작아질수록 사이버 공간은 보다 많은 계산점들로 채워지게 되어 보다 정교하게 대기의 움직임을 재현할 수 있다. 고감도 필름을 이용하면 보다 선명한 화질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컴퓨터의 계산능력은 유한하다. 모델의 해상도를 강화하면 예측하고자 하는 지역의 범위가 줄어든다. 특정 대기현상을 자세하게 계산하려면 다른 현상은 소홀히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예측대상에 따라 적합한 모델도 달라진다. 전지구(全地球)모델은 5∼10일간의 기류예측에 쓰인다. 앞으로 5일 이상의 기상을 예측하려면 지구 반대편의 기상상태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고층의 강풍대를 타고 서에서 동으로 전파하는 대기파동의 속도가 하루에 최고 3천㎞에 이르기 때문이다.

 현존 컴퓨터 처리속도의 한계 때문에 세계적인 중기예측센터에서도 지구모델이 분해하는 단위 상자의 체적은 50㎞×50㎞×2백m 정도이다. 구름의 발달과정과 태양빛의 전달과정은 매우 단순하게 취급되어 왔다. TV 일기예보 시간에 자주 등장하는 고기압·저기압의 위치와 세기를 예측하는 것이 이 전지구모델의 주요 임무이다.

 예보지역을 극동아시아로 제한하면 컴퓨터가 분해할 수 있는 단위 상자의 체적이 많이 줄어들어 그만큼 지역기상을 상세하게 계산할 수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지역(地域)모델이 갖는 단위 상자의 체적이 20㎞×20㎞×2백m 정도까지 줄었다. 위성사진에서 쉽게 판독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소용돌이 또는 띠 모양을 한 비구름들의 위치와 강도가 지역모델의 주요 예측대상이다. 지역모델에서 기상현상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전지구모델과는 달리 예보지역으로 진입하는 비구름의 동태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 이 정보는 보다 분해능이 낮은 전지구모델의 출력자료로부터 제공된다. 예보지역의 어느 한쪽 끝에서 중심까지 비구름들이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통상 2일 정도이므로 지역모델의 예측기간도 이를 넘어설 수 없다.

 기상레이더에 포착된 폭우성 비구름의 모습은 매우 복잡하다. 때로는 작은 세포들이 줄을 이어 폭이 약 10㎞ 정도의 좁은 띠 모양을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작은 세포들이 한 데 모여 포도송이 같은 모양을 취한다. 지난 여름철의 집중폭우는 흔히 이런 호우세포들이 연속적으로 통과할 때 일어나는데 이 호우세포 군단의 동태를 적절히 예측하기 위해서는 사방 10㎞ 이하의 국지(局地)모델이 필요하다. 예보지역도 함께 줄어들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통상 앞으로 12시간 동안 호우세포 군집(群集)체의 발달정도와 이동경로를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개개 호우세포의 강수 강도는 국지모델로도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다. 국지모델은 수증기 분자에서 수천㎞의 전선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운동간의 복잡한 물질, 운동량, 에너지의 교환과정을 다루고 있다. 지표면의 높이와 성질이 서로 다른 지역에 태양빛이 쪼이면 난류가 활성을 띠고 지표부근에 바람이 모이는 곳이 생겨난다. 강한 바람이 산맥을 넘을 때에도 바람이 모인다. 바람이 수렴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국지적인 소나기성 비구름들이 국지모델의 주요 예보 타깃이다. 모델에서는 수십초 단위로 3차원의 강수량 분포도가 미세한 바둑판 위에서 계산되므로, 이를 비디오나 TV에 동영상으로 보면 매우 생동감 있는 날씨 시나리오가 된다.

 태풍은 반경 20∼30㎞ 이내에 원자폭탄 몇천개의 위력을 담은 작고도 매우 강한 비구름 군단이다. 태풍모델은 중심을 향해 모여드는 바람으로부터 해상의 수증기가 도넛 모양의 비구름으로 형성되는 물리과정을 자세하게 다룬 국지모델의 일종이다. 태풍의 진로를 컴퓨터로 예측하기 위해서는 관측된 태풍의 위치에 나선형의 3차원 바람구조를 재생하는 매우 예술적인 작업이 선행된다.

 대기는 위로는 끝없이 열려 있으나 밑으로는 육지와 바다에 접해 있다. 전지구 면적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바다는 대기엔진을 돌리는 데 필요한 열과 수증기를 공급하는 주 에너지원이다. 엘니뇨와 같은 전지구적 규모의 이상기후를 컴퓨터로 재현하거나 예측하기 위해서는 전지구를 둘러싼 대기뿐 아니라 해양의 운동을 함께 다루는 대기-해양 접합 기후모델이 이용된다. 지난 97년 4월에 시작, 올 여름에 끝난 금세기 최고의 엘니뇨는 선진 각국의 기후모델에 의해 사전에 예측이 가능했다. 대기과학자들은 태평양 상에 집중 배치된 해상관측망에서 보내온 해수면 온도 분포도와 각종 기상관측 자료를 기후모델에 입력해 계산한 결과 이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미국의 국립대기과학연구소, 영국의 하드리센터, 독일의 막스프랑크 연구소, 일본 기상연구소 등은 대기-해양 접합 기후모델을 가지고 산업화에 따른 지구환경 변화를 추정하고 있다. 산업발전으로 늘어난 온실기체들은 대기 중으로 진입하는 태양광은 통과시키면서 지구시스템에서 외계로 발산되는 전파에너지는 차단, 지구대기의 평균온도를 꾸준히 높이는 역할을 한 것으로 대기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량이 2배로 늘어난다면 지구대기의 평균온도는 얼마나 올라갈까. 이때 태풍이나 집중호우의 강도와 빈도는 어떻게 달라질까. 실제 지구대기에 직접 이산화탄소를 2배로 주입해 기후변화를 관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기-해양 접합 기후모델을 이용한 컴퓨터실험이 이 경우 적절한 해법이다.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조건도 모델대기에서는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

 모델의 지표면 성질도 손쉽게 바꿀 수 있다. 티베트 고원을 평지로 만들거나, 남극의 설원을 맨땅으로 채웠을 때 예상되는 기후변화도 컴퓨터로 미리 짚어볼 수 있다. 과거 수십억년 전부터 자주 일어났던 빙하기도 당시의 천문학적 지구궤도와 대기성분비를 기후모델에 입력, 재현해 보임으로써 고기후를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컴퓨터들이 다운사이징화하는 경향을 틈타 대기과학과 관련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나름대로 개발한 미세(微細)모델을 연구나 사업에 활용하고 있다. 공장의 연기를 시간별로 추적하는 모델에서 군 단위 소지역의 기후를 재현하는 모델까지 그 내용과 용도도 대기환경·수자원·농업 등으로 다양하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는 터널을 직접 뚫지 않고도 한 마을에서 흘러나온 폐기가스들이 터널공사 후 다른 마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미리 파악할 수 있다. 공장을 직접 세우지 않고도 이 공장의 연기가 어느 지역을 크게 오염시키는지 미리 살펴볼 수 있다.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능 오염물질이나 중국에서 날아드는 황사의 이동경로도 추적이 가능하다. 이 미세모델들은 단위 상자의 체적이 1㎞×1㎞×1백m 정도로 광역의 모델에서 예측된 바람과 기온장을 기초로 상세한 소권역의 기상이나 기후를 재현하거나 예측한다.

 맑음·흐림·비 등의 날씨기호와 기온·습도·기압 등의 3차원 기상장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일기도에서 다양한 정보를 종합하고 해석, 일반적인 패턴과 이례적인 특징을 찾아내고 앞으로의 날씨를 전망하는 작업에는 수학과 컴퓨터 계산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지적인 과정이 결부되어 있다.

 시골길을 오토바이로 시속 60㎞로 달릴 때 운전자가 겪는 정보처리과정을 상상해보자. 수십분의 1초 사이에 맨땅의 굴곡과 전방의 장애물에 대한 시각감지에서 뇌의 판단을 거쳐 다시 팔의 근육으로 운전대를 틀 때까지 엄청난 정보가 빛의 속도로 처리된다고 볼 수 있다. 컴퓨터가 운전하는 오토바이를 누가 믿고 탈 수 있을지 당장 상상이 안간다. 현재 가장 빠른 컴퓨터도 오토바이 운전자를 대신할 수 없고 앞으로 수십년 후에도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

 대기현상 중에서 이미 과학적으로 확립되고 수학적으로 표현 가능한 부분영역에서 컴퓨터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기상예측모델은 실세계의 복잡한 대기현상을 단순한 법칙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다시 반복적인 산술연산으로 단순화한 결과이다. 컴퓨터는 이 단순업무를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해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화로 인해 비롯된 현실과 계산의 예측오차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일정한 시간간격으로 나란히 걸려 있는 일기도의 흐름에는 컴퓨터의 계산규칙으로 미처 환원되지 못한 부지(不知)의 영역이 있다. 컴퓨터가 계산한 예측결과가 관측치로부터 멀어졌을 때 컴퓨터가 출발한 초기 분석장에서 어느 부분의 분석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하여 컴퓨터에 다시 계산할 것을 명령하는 것도 사람의 일이다. 한국·일본·유럽에서 각기 컴퓨터가 예측한 결과들이 서로 상이할 때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정도 비중을 둘지를 결정하는 것도 사람의 일이다. 더욱이 컴퓨터의 예측모델이 자연을 가깝게 모사할 수 있도록 무지의 영역을 줄여 가는 것도 사람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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