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반도체 빅3 "대약진"

 세계 반도체업계에서 유럽세의 약진이 급속히 부각되고 있다. 96년 이후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태평양지역 반도체업체들은 주력 반도체인 D램 시황의 급속한 악화와 그에 따른 실적감소로 체력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조조정에 착수한 상태다. 반면 유럽의 주요 반도체업체들은 불안한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신속한 경영판단으로 D램 시황이 악화되기 시작한 95년 이후 한층 빠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특정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유럽 특유의 사업전략이 성공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유럽지역의 대표적인 반도체업체로는 필립스·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지멘스 등 3사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업체는 93년 당시 세계 반도체 매출 순위 12, 14, 18위에서 각각 9, 10, 12위로 뛰어오르며 세계 반도체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특히 95년까지 미국·일본·한국업체들이 싹쓸이했던 10위권에 96년에는 2개 업체가 들면서 기염을 토했다.

 필립스는 지난 80년대 말까지 메모리 특히 S램분야에서 제법 비중있는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90년 들어 S램사업은 필립스의 큰 두통거리가 됐고 이 때문에 당시 반도체부문 책임자였던 하인츠 하그마이스터 씨는 『이대로 사업이 유지된다 해도 반도체부문 실적향상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며 91년 메모리사업에서의 완전 철수를 표명했다.

 이후 필립스 경연진은 「반도체메모리는 악마의 비즈니스」라며 메모리사업을 멀리했고, 최근 대표적인 메모리인 D램 가격이 1∼2년만에 10분의 1 수준으로 하락하는 것을 보며 과거의 경험에 감사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필립스가 메모리사업을 「악마의 비즈니스」라고 표현한 이유는 메모리사업이 시작 후 6년 동안은 큰 돈을 벌 수 있으나 7년째부터는 그동안 벌었던 모든 돈을 투자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같은 부담은 부담대로 존재하면서 사업초기에도 큰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필립스의 반도체사업은 91년 메모리 철수 이후 4년만인 95년 흑자로 전환됐으며 96년에는 매출 세계 랭킹 9위로 도약했고 지난해에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또 올 상반기(1∼6월)에도 매출이 전년대비 16% 확대돼 부진을 거듭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업체들을 제치고 한층 상위에 랭크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메모리 사업을 중단한 필립스가 가장 중점적으로 육성한 분야는 가전용 로직반도체. 지난해 매출 44억4천만달러 가운데 가전 관련 반도체의 비율이 45%였으며 특히 TV용 로직반도체는 세계 시장의 40% 이상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이밖에 필립스는 통신기기용 반도체와 자동차용 반도체, 전력용 반도체 등 주로 로직 반도체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특이할 만한 것은 각각의 분야에서 세계 랭킹 3위 이내를 사업 존속의 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필립스는 메모리로 대표되는 채산성 없는 사업은 확실하게 포기하고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되거나 장점을 확보하고 있는 분야를 집중 공략하는 사업 전략으로 세계시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SGS톰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프랑스·이탈리아 공동업체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도 침체기를 맞고 있는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몇 안되는 업체 가운데 하나다.

 지난 5월 SGS톰슨에서 ST로 개명한 이 업체의 세계시장 매출 순위는 10위. 매출규모도 규모지만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는 순이익 비율이 96년 15%, 반도체 불황이 심각했던 지난해에도 11.7%로 매우 높았다. 이같은 고수익 체질의 유지가 가능한 것은 자동차 및 통신, 스마트카드 등의 전용 IC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제품을 몇 가지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이해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적극적인 제휴 전략. 이 업체는 지난 90년 이후 6년 동안 제휴업체 수를 5배로 확대해 놓고 있다. 특정분야 전용LSI의 매출이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는 우량기업으로 성장한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도 회사 설립 초기인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는 매년 적자가 누적되는 문제기업이었다. 프랑스 톰슨세미컨덕터와 이탈리아의 SGS마이크로일렉트로니카가 합병해 SGS톰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라는 이름으로 재출발한 것은 87년 4월. 이 합병 반도체업체는 국영기업에 가까운 둔한 움직임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문화차이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초기에는 1백만개 생산에 5백개 이상의 불량품이 나오는 심각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합병이후 곧바로 실시한 회사내 영어공용어 작업이 실효를 거두고 연구개발비와 설비투자비를 각각 전체 매출의 15.2%와 25.8%로 높게 책정하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았으며 88년부터 시작된 품질개선 운동으로 불량품도 1백만개당 15개로 줄어들었다.

 이에 힘입어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는 92년 이후 흑자기조를 유지해 오고 있는데 특히 가격하락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D램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어 당분간 큰 어려움 없이 빠른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 반도체업계 10위권 진입을 노리는 지멘스도 유럽지역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표적 반도체업체다.

 올해 중순 반도체업계의 최대 화제 가운데 하나로 지멘스의 「D램 사업 전면 중단설」을 꼽을 수 있다. 최근 1∼2년 동안 D램 시황은 심각한 불황 국면을 맞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업계 관계자들은 별다른 의심없이 중단설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7월 30일 지멘스가 9월말일자로 16MD램을 생산하는 비교적 첨단시설을 갖춘 영국 D램 공장을 폐쇄한다고 발표하면서 중단설은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멘스는 영국 공장 폐쇄 발표 며칠 뒤 영국공장 폐쇄는 채산성이 떨어지고 있는 16MD램 생산량을 크게 줄이기 위한 방안이었을 뿐 「D램 사업 포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멘스의 반도체 매출은 최근 5년간 매년 두자리 수 성장을 유지해 왔다. 93년 15억달러였던 매출이 지난해에는 2배가 넘는 35억4천4백91만달러로 확대됐다. 세계 랭킹도 93년 18위에서 지난해에는 12위까지 올라 10위권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순이익은 95년 5억3천8백19만달러를 최고로 2년 연속 하락세를 보였으며 올해에는 수년만에 처음으로 적자 전락이 확실시되고 있다. 물론 이같은 순이익 감소의 원인은 불과 2년만에 10분의 1 수준으로 하락한 D램 사업에 있다.

 이에 지멘스는 D램 사업의 근본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 D램을 양산하고 있는 4개 공장 가운데 폐쇄 가능한 공장을 선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최첨단 공장인 독일 드레스덴과 PC생산거점이 가까워 지리적으로 중요한 미국과 대만공장이 제외되고 최종적으로 영국공장이 확정된 것이다. 즉 영국공장 폐쇄는 역량을 집중시켜 다시 한번 D램 사업에 본격 도전하기 위한 포석인 셈이다.

 지멘스는 D램은 반도체산업 전체 기술 수준을 높이는데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인식은 대부분의 반도체업체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지멘스도 물론 같은 유럽계 업체인 필립스와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처럼 세계시장에서 점유율 상위권에 들어있는 제품만을 중점 육성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D램의 경우도 현재 가격 경쟁력이 가장 높은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를 능가하는 기술력 확보를 지향하고 있다. 지멘스는 로직LSI와 광 디바이스 등 자사가 자신감을 갖고 있는 특정분야 사업을 한층 강화하는 동시에 D램사업도 첨단 제품에 승부수를 띄워 오는 2001년까지 매출을 현재의 2배로 늘린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심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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