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격동의 시대-금융실명거래 파동 (2)-(상)
82년 7월 중순 어느날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전산개발센터 성기수 소장실에 재무부 장관 강경식(姜慶植)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성 박사, 지금 나와 함께 청와대에 좀 올라가야겠습니다. 성 박사가 직접 각하에게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자세한 것은 만나서 얘기합시다.』
강경식은 누군가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83년 1월까지 금융실명거래 도입을 위한 전산시스템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론과 야당에 떠밀려 억지로 금융실명거래 실시를 발표하게 했던 전 대통령으로서는 이 같은 컴퓨터 변수가 상황을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금융실명거래 실시시기를 놓고 여야가 한치 양보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여당인 민정당(民正黨)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실시는 하되 당장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야당인 민한당(民韓黨) 등은 흐트러진 민심수습과 투명한 금융거래를 위해 83년 1월부터 즉각 실시를 주장하고 있었다.
여야의 대치상황이 절정에 이른 것은 금융실명거래용 전산시스템 개발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대목에서였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전산처리 문제가 정쟁의 회오리 한복판에 진입했던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 열쇠를 KAIST 전산개발센터 소장 성기수가 쥐고 있는 격이었다.
금융실명거래 시기를 놓고 여야가 맞붙게 된 것은 82년 5월에 터진 이철희·장영자 어음부도 사건이 직접적인 발단이 됐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철희·장영자 사건은 그나마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고 있던 5공화국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던 희대의 어음사기극.
이 사건으로 강압정치에 숨을 죽여오던 여론과 야당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 수습책임을 맡게 된 정부측 인물이 당시 재무장관 강경식이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때마침 찾아온 여름 장마와 함께 신문과 방송에 연일 오르내리던 82년 6월 말 어느날 저녁 강경식이 성기수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두 사람의 친분은 구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산실이 경제기획원의 예산업무 전산화를 담당하던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본란 8월 13일자 제28회 참조).
당시 성기수는 구 KSIT 전산실 실장, 강경식은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이었다. 둘의 관계는 3단계의 예산업무 전산화가 마무리되는 70년대 말까지 10년 넘게 지속돼 왔다.
전화를 걸어온 강경식은 여러 가지 뜸을 들이더니 본론을 꺼냈다.
강 : 종합과세를 위한 전국민의 금융소득 데이터베이스화가 우리 기술로 가능합니까?
성 : 가능하고도 남습니다.
강 :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내 얘기는 연내에 완료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성 : 연간 발생하는 기본 데이터 건수가 몇건 정도나 됩니까?
강 : 5천만건 정도입니다.
성 : 5천만건 가운데 컴퓨터로 기록된 것은 얼마나 됩니까?
강 : 전국 2천여개의 금융기관 본·지점 가운데 40% 정도에 컴퓨터가 설치돼 있으니 대략 2천만건 정도가 될 것입니다. 3천만건은 금융기관별 서식에 따라 종이에 기록되고 있지요.
성 : 전화 끊지 말고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대강 계산해 보니 3천만건 정도의 개인 금융소득 데이터는 발생 당해연도에 전산입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 : 그렇다면 내년부터 전산시스템을 이용해 전국민에 대한 종합과세가 가능합니까?
성 : 연말까지는 아직 6개월 남아 있는데 그 정도 개발기간이면 충분합니다.
강 : 됐습니다. 나는 성 박사만 믿습니다.
두 사람의 전화통화가 있은 지 1주일 뒤인 82년 7월 3일 오전 강경식은 이른바 7·3조치, 즉 금융실명제의 전격적인 도입을 발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은 이제까지의 금융거래가 가차명 또는 무기명으로 이뤄져 왔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점을 시인하고 83년부터 금융실명제 도입을 통해 종합과세 등 금융거래질서를 바로잡겠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제2의 경제도약을 실현하겠다는 정책의지도 함께 표명했다.
7·3조치의 요지는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83년 7월 1일(신규거래는 83년 1월 1일부터) 이후 예금·증권 등 모든 금융거래에 대해 개인은 주민등록증, 법인은 사업자 등록번호에 의한 전면적 실명거래제를 실시한다.
2. 종합소득세율은 75%에서 50% 수준으로 인하하되 분리과세하던 이자·배당 등 15%의 금융자산 소득세율은 종합소득세에 합산 과세한다.
3. 실명화 과정에서 출처불명의 자금은 일정 조건 하에서 출처조사와 증여세 추징을 하지 않는다.
7·3조치에 대한 실천의지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당시 극소수의 핵심 권력층만 알고 있을 일이지만 적어도 재무장관 강경식의 의지만은 확실한 것이었다. 강경식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의지와는 별개로 처음부터 강력한 금융실명제 도입론자였다. 정치적 궁지에 몰린 정부 여당에 금융실명제 추진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던 이도 강경식이었다.
7·3조치가 발표된 이틀 후 재무부 회의실에서 장관 주재로 대책회의가 소집됐다. 거의 모든 금융계 대표들과 세무·정책 책임자 그리고 성기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실명제 실시방안이 논의됐다. 그러나 사안의 중대성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긴급하게 결정된 조치였던 만큼 그날 회의는 난상토론으로 일관되었다. 결국 이날 토론은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KAIST 전산개발센터가 기술적으로 해결해주는 판정관 역할을 떠맡게 된 채 끝났다.
다음날로 재무부 차관 김흥기(金興起·전 한국은행 총재)를 위원장으로 하는 금융실명거래전산화추진위원회가 발족됐다. 성기수의 주장대로 KAIST 전산개발센터가 과연 실명제 도입을 위한 전산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느냐에 대한 기술적 타당성을 공론화하기 위한 것이 위원회 활동의 목적이었다.
위원장 밑에 재무부 제2차관보 이진설(李鎭卨, 안동대 총장)과 성기수를 책임자로 하는 종합기획소위원회와 연구개발소위원회가 조직됐고 두 소위를 지원할 행정지원소위원회도 따로 설치됐다. 종합기획소위에는 이진설과 성기수 외에 이재국장 강현욱(姜賢旭·한나라당 의원), 증권보험국장 안공혁(安恭赫·국민투자신탁증권 회장), 세제국장 백원구(白源九·전 증권감독원장), 국세청 자료관리관 이상혁(李相赫·전 서울지방국세청장) 등과 KAIST 전산개발센터 선임연구원 이단형(李檀珩·ETRI 컴퓨터소프트웨어연구소 부장)이 가세했다. 금융실명거래전산화추진위원회는 재무부가 국회에 7·3조치 발표 후 2주 이내에 금융실명제 도입에 대한 정책대안을 제시키로 함에 따라 바빠졌다.
사실 5천만건 이상의 금융거래 건수에 대한 전산화 타당성을 검증하고 그 방안을 2주 내에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성기수는 이단형을 통해 기획조정위원회측에 2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2주간의 시한 가운데 10일을 전산개발센터의 기술적 타당성 조사분석 기간에 할애해 줄 것, 또 하나는 이 기간 동안 모든 금융기관에 대한 자료제출 요구 및 현장확인 권한을 부여할 것 등이었다.
기획조정위원회 활동 1주일 만에 전국 모든 금융기관을 통한 돈의 흐름이 정량화(定量化)하기에 이르렀다. 9개의 금융기관 산하 2천여개의 단위 금융기관이 있으며 실명확인이 필요한 연간 거래건수가 5천3백만건이라는 사실도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다음은 과연 전산개발센터가 문제의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느냐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일이었다. 68년 KIST 전산실 발족 이후 수행했던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다시 검증하고 분석하여 실행계획을 수립해 보았다. 10일 만에 4백만건 이상 답안지를 입력할 수 있도록 한 대입 예비고사 채점 전산화, 전국적인 전산화를 통해 1천만건 이상의 가족 단위 데이터를 입력할 수 있도록 한 의료보험관리공단 데이터베이스, 연간 2천만∼3천만건의 의료급여 평가 및 진료비 정산이 요구되는 의료보험연합회의 전산화 등이 사례로 제시됐다. 그 결과 금융실명거래전산화추진위원회는 KAIST 전산개발센터가 금융실명제 전산시스템을 충분히 개발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82년 7월 14일 강경식은 국회에 나가 전산개발센터가 전산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으며 83년 1월부터 금융실명제 실시가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답변에 나선 과기처 장관 이정오(李正五·KAIST 석좌교수)가 과연 전산처리가 가능하겠느냐는 여당 의원의 질의에 『복잡할 것』이라는 어정쩡한 답변을 해버렸다. 재무부 장관의 답변을 과기처 장관이 뒤엎어버린 격이었다. 여당으로서는 울고 싶었는데 과기처 장관이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그날로 강경식은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다. 대통령으로부터 주무부처인 과기처 장관이 기술적으로 안된다는데 재무부 장관이 무슨 수로 가능하냐며 핀잔을 받았을, 뻔한 상황이었다.
강경식의 전화는 그런 자신을 도와 대통령 앞에서 전산시스템 개발에 문제가 없음을 직접 설명해 달라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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