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업계 나라말 지키는 사람들

 극심한 자금난으로 도산 직전까지 내몰렸던 한글과컴퓨터가 벤처기업협회 등으로부터 총 2백억원에 달하는 자본을 유치한 데 이어 광복절을 기념해 선보인 「아래아한글815」 특별판이 판매 1달여 만에 40만명의 회원을 모집해 회사를 극적으로 회생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같은 반전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 한글과컴퓨터가 그 동안 국내 컴퓨터 사용자들 사이에 한글 정보화의 선두주자라는 인식이 깊이 심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 나라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아래아한글을 만든 이찬진씨 밖에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언론에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숨어서 한글의 과학화에 힘써온 인물들이 의외로 많다.

 우선 일반인들이 돈을 내고 살 수 있는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처음 국내 시장에 내놓은 사람은 이찬진씨(33)가 아니라 현재 제이소프트(주)의 대표인 강태진씨(39)였다. 88년 강씨가 내놓은 상품명은 「한글 2000 워드」. 물론 그 전에도 삼보컴퓨터의 「보석글2」, 삼성전자의 「마이워드」 등이 있었지만 패키지 소프트웨어라기보다는 번들용으로 제공된 제품이라는 인식이 깊었다.

 당시 서울대 기계공학과 학생으로 이 제품을 접했던 이찬진씨가 샅샅이 버그를 잡아내 강씨에게 보냈지만 별 반응이 없기에,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만들어보자」며 시도했던 제품이 89년 출시된 「아래아한글」이었다. 아래아한글의 정보화 및 대중화를 성공으로 이끈 이찬진씨는 일반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됐지만, 강태진씨는 소프트웨어 1호라는 성과를 누리지도 못한 채 잊혀졌다.

 아래아한글 다음으로 일반인들의 사랑을 오래 누린 소프트웨어는 90년 출시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워드 연습용 「한메타자교사」였다. 이를 만들어 낸 「한메소프트」의 김재인씨(35)도 우리나라 소프트웨어개발사에 획을 그은 인물로 기록될 만하다.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한글판을 만들어내 그 필요성조차 없어져 버렸지만, 영문판 도스, 윈도 운용체계 등을 한글화시켜 줬던 「한메한글 도스형(90년)」 「한메한글윈도용(92년)」의 개발자 이창원 사장(32·현 한메소프트 사장)도 있다.

 또 컴퓨터 통신의 등장과 함께 등장한 통신접속용 소프트웨어 「이야기」를 89년 만들어낸 「큰사람정보통신」의 이영상(29)·황태욱(30)·이종우씨(30)도 우리 글을 기반으로 통신을 멋들어지게 할 수 있게 한 기억할 만한 인물들이다. 또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컴퓨터 통신접속 소프트웨어 「데이타맨」을 94년 개발한 새롬기술 오상수 사장(33)도 빼놓을 수 없다.

 전자출판 소프트웨어의 대명사로 군림한 「문방사우」를 만든 휴먼컴퓨터 박화선(34)·심인숙(33)·최성호씨(37)도 우리의 한글을 기반으로 한 출판분야를 과학화·정보화하는 데 기여한 대표적인 소프트웨어업계 인물이다.

 이밖에도 최근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나모 웹에디터2.1」을 선보인 나모인터랙티브의 박흥호 사장(35)과 해외 시장에서 더 성가가 높은 「칵테일98」을 개발한 칵테일사의 이상협 사장(19)은 각각 앞으로 더욱 큰 활약이 기대되는 「한글 지킴이」들이다.

 특히 박흥호 사장은 부산대 국문과를 졸업한 국어교사 출신으로, 본업인 안과의사보다 한글타자기 개발자로 더 유명한 고 공병우 박사가 운영하던 한글문화원 연구원을 지낸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이며 지난 90년 한글과컴퓨터에 입사,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아래아한글 개발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박 사장은 그 후 95년 나모인터랙티브를 설립, 대표를 맡으면서 「나모 웹에디터」라는 홈페이지 저작도구 외에도 검색엔진 등을 개발·공급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9일 한글학회로부터 국어운동 공로표창을 받기도 했다.

 지금까지 PC에서 한글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각종 응용프로그램을 주로 살펴보았다면 이러한 도구개발의 바탕이 되는 한글 그 자체를 연구하는 분야도 많다. 흔히 전산언어학(CL:Computational Linguistics) 또는 자연어처리(NLP:Natural Language Processing)라고 부르는 학문분야가 바로 그것으로 번역소프트웨어, 문서인식, 검색엔진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 개발에 필수적인 작업이다.

 최근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회사 뒤에는 대부분 같은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는 전산 또는 언어학자들이 한두 명 정도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최근 문자인식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인식기술의 이인동 사장은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에 있을 때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학원에서 인공지능을 가르치던 김진현 교수(전산과)를 만났기 때문에 창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창업 후에도 수시로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인공지능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미 UCLA의 펄(Pearl) 교수의 수제자. 고려대 이성한 교수와 연세대 조성배 교수가 각각 그의 제자다. 또 초기에 「아리랑」이라는 워드프로세서에서 국내 최초로 필기체 인식 기능을 구현한 핸디소프트 안영경 사장과 조창재 이사도 모두 KAIST에서 그에게 인공지능을 배운 제자들이다.

 이에 비해 번역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서울대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바로 김영택 교수(컴퓨터공학과)가 10여 년 동안 주로 한국IBM 등으로부터 연구자금을 지원받아 영·한 등 한글 번역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IBM이 최근 내놓은 「앙코르」는 바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편 앞으로 한글의 정보화를 논할 때 그 활약이 기대되는 학자와 업체로 KAIST의 최기선 교수(전산과)와 그의 연구성과를 산업화하고 있는 언어기술이라는 회사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최 교수는 언어학과 전산학의 접목에 힘써, 그동안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어 정보처리 기술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그동안 기계번역, 정보 검색, 시소러스, 전문용어 구축 등에 주력했으며 최근 한국어 정보처리의 표준화를 위한 연구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

 또 언어기술(대표 방기수)은 한글 등 언어처리에 필요한 기술요소를 부품화해 문서 정보를 다루는 여러 가지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시스템의 성능을 높이는 사업분야에 주력, 주어진 문서에서 가장 중요한 몇 개의 키워드를 추출해 요약문을 작성하는 문서 요약기와, 많은 문서에서 그 내용이 비슷한 것을 뽑아내는 문서분류기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서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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