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33)

제6부 대망의 70년대-증권업무 전산화 (8)

「사이버72-14」 초대형 컴퓨터가 시험가동을 거쳐 현업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73년 9월부터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전산부가 여기에 때맞춰 수행했던 프로젝트가 증권거래업무 전산화였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긴 했지만 전근대적 요소가 많았던 격탁(擊柝)매매를 사라지게 한 세계 최초의 증권전산화라 할 만했다. 이때의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어 77년 9월 탄생한 회사가 증권전산 전문업체인 한국증권전산주식회사이다.

 75년만 해도 증권매매는 필기구를 이용해서 종이에 매매주문을 내는 포스트(Post)매매와 일명 딱딱이를 두드려서 일일이 매매의 성사를 알리는 격탁매매 방식이 함께 사용되고 있었다. 격탁매매는 사자는 주문과 팔자는 주문의 가격이 꼭 맞아떨어지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가격결정 때마다 매번 딱딱이를 두드리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돼 상장종목의 수가 많을 때는 여러 문제점을 야기시킨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 포스트매매는 사자와 팔자 주문의 가격이 꼭 맞아떨어지지는 않으나 가격결정 과정을 신속하게 진행시킬 수 있어 상장종목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했다. 당시 이런 방식의 매매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서울의 명동에 있던 한국증권거래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산부장 성기수가 증권거래업무의 전산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정부의 중장기 경제개발계획의 계량(計量) 등에 직접 참여하면서부터였다. 계량경제에 눈을 뜨면서 성기수는 금융 분야와 함께 물가에도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물가관리 과정을 체계화할 경우 큰 성과가 있을 법했다. 소속 연구원들을 통해 금융과 물가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조사가 이뤄졌다. 82년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강경식(姜慶植)과 의기투합해서 금융실명제 도입을 위한 전산화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관심과 연구조사의 결과였다.

 하지만 경제개발에 전력투구하던 당시 3공화국 정부가 물가관리를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여기고 있던 부문이라 KIST 전산부로서는 조사 수준의 접근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먼저 손을 댄 것이 증권거래업무 전산화였다. 73년 초 성기수는 때마침 전산부 연구원 가운데 경영학을 전공한 안태백(安泰伯, 국민대 경영대학원장)으로부터 증권에 대해 연구해본 다음 그 결과를 프로젝트로 발전시켜 보겠다는 기획제안을 보고받았다.

 안태백은 이미 증권회사에 다니던 친구의 도움을 받아 증권분석프로그램을 개발해 놓고 있었다. 그러자 전산부 안팎에서는 KIST에서 「돈놀이 장사」인 증권분야에까지 연구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느냐며 이 제안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들이 쏟아졌다. 증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성기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안태백을 격려하고 나섰다. 성기수는 장차 증권업무는 국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컴퓨터의 활용이 무한정 확대될 분야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경제규모가 확대될수록 기업의 덩치가 커지고 상장기업수가 늘어나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증권 인구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격탁매매는 물론이거니와 포스트매매방식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기수는 처음부터 증권거래소 측에 격탁매매와 포스트매매를 뛰어넘는 전산매매를 제안했다. 일반 업무의 전산화에서부터 매매체결까지 전과정을 자동화하자는 것이었다.

 돈이 오고가는 과정을 자동화한다는 점에서 매매체결의 전산화 계획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증권거래소 이사장 김용갑(金容甲, 전 한국증권단 대표)은 전산매매를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보수적인 증권거래소 측을 설득하기 위해 성기수는 우회작전을 썼다. 증권거래소 등에 큰 영향력을 가진 한국개발연구원(KDI)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KIST 회의실에 내로라 하는 KDI 소속 경제학자를 모아놓고 성기수가 직접 설득에 나섰다. 증권매매체결의 전산화에 대해 우선 경제학자들의 이해를 구함으로 여론을 환기시켜 나갈 심산이었다. 하지만 KDI 경제학자들의 반응은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성기수의 계획은 경제학자들에게도 「너무 앞서 가는 것」으로 비쳐졌던 것이었다.

결국은 우선 격탁매매를 없앤 다음 포스트매매 업무를 전산화한다는 선에서 매듭지어졌다. 하지만 포스트매매의 전산화 자체도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증권가에서는 격탁매매를 없애는 데 따른 반대여론이 많았다. 당시 한 신문의 보도는 격탁매매 논쟁의 실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격탁매매를 전근대적인 매매 양식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포스트매매가 지나치게 시기상조라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여하튼 증권관리당국은 소위 딱딱이로 불리는 격탁매매를 점차 축소, 종국에는 완전 폐지할 것이라고 한다.』

〈서울경제신문 74년 5월15일자〉

 증권거래소 측은 KIST 전산부의 전산화 일정에 따라 74년말까지 30개 종목을 제외한 전 상장 종목을 모두 포스트매매로 전환하는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전산화에 앞서 격탁매매 종목들을 모두 포스트 매매방식으로 편입시킨다는 전제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KIST 전산부가 포스트매매 등 증권거래 업무 전산화를 위해 개발한 프로그램들로는 당일거래 매매원장, 당일거래 청구서, 당일거래 수도대금 수불표, 보통거래 매매원장, 보통거래청구서, 보통거래 수도대금수불표, 제요금징수표, 신용거래 상황 집계표, 수도상대 지정서, 수도대금명세서, 수도증권 수불표, 매매량집계 일람표, 매매증거금 거래원별 상황표 등이 있다.(매매체결 과정까지의 전산화는 훗날 한국증권전산주식회사가 해결했다. 물론 이때도 KIST 전산부의 후신인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75년 4월까지 KIST전산부가 수행한 증권거래업무 전산화는 원격지(홍릉)인 KIST 전산부의 「사이버72-14」 컴퓨터에 텔레타이프라이터(TTY) 터미널을 접속한 온라인처리 방식으로 이뤄졌다. 전산화 초창기 TTY는 한국증권거래소에 3대를 비롯 각 증권사와 대한증권업협회 등 관련기관 등에 1대씩 모두 35대가 설치됐다.

 한편 증권거래업무 전산화가 시작된 직후인 73년 10월 KIST전산부는 과학기술처 산하 중앙전자계산소(NCC)로부터 정부공공 부문의 전산화 개발업무 일체를 넘겨받음으로써 또 한번의 조직확대를 꾀하게 됐다.

 KIST 전산부의 존재를 위협할 만큼 기세가 등등했던 NCC가 철퇴를 맞은 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컴퓨터범죄 사건으로도 유명한 반포 AID 차관 아파트 부정추첨사건 때문이었다. AID 차관 아파트는 대규모 단지인 데다 입지조건도 좋아 분양전부터 서울시민의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정부는 아파트 분양 과정에서 부정의 개입 여지를 없애기 위해 모든 추첨을 컴퓨터로 처리키로 하고 그 개발업무와 운영관리를 NCC에 맡겼다. 바로 그 NCC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었다.

 사건을 저지른 것은 말단 프로그래머였다. 수십명의 입주신청자들로부터 뇌물청탁을 받고 추첨프로그램의 처리과정을 임의 조작하는 방법을 통해 9세대 분의 부정추첨자를 냈다.

이 부정추첨은 데이터의 처리과정이 감시용 출력장치인 콘솔프린터에만 나타나고 데이터 보존용 디스크장치에는 기록되지 않는다는 당시 컴퓨터들의 기능상의 한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사건이었다. 데이터처리 과정을 직접 지켜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발견해 낼 수 없었던, 이를테면 완전범죄와도 같은 사건이 발각된 것은 청탁과정에서 불만을 샀던 동료 NCC 직원의 검찰 투서에 의해서였다. 실제 부정당첨된 9세대 가운데 5세대가 NCC 직원인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NCC는 KIST전산부가 「사이버72-14」를 도입하기까지 국내 최대 용량의 컴퓨터였던 「유니백 1106」을 보유하고 있었다. 과기처 장관 김기형(金基衡)은 KIST 전산부를 의식해서 NCC의 모든 컴퓨터 장비는 무조건 최고수준으로 도입하곤 했다. NCC의 직원들도 최고 대우였다. 사실 이때까지도 KIST 전산부와 70년 4월 발족된 NCC는 조직의 성격이나 업무가 뚜렷하게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관계에 있었다.

 이 사건으로 NCC는 모든 개발업무를 KIST 전산부에 넘기면서 총무처 산하기관으로 편입됐고 명칭도 정부전자계산소(GCC)로 바뀌었다. 업무 역시 정부부처의 전산실 운영관리만 맡는 등 조직과 위상이 크게 축소됐다. 잘 나가던 와세다대학 전력공학 박사 출신의 NCC 소장 송길영(宋吉永, 고려대 교수)도 사표를 냈다. 성기수가 처음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에 무게를 두었다면 송길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 입문서인 「전자계산기 입문」을 저술하는 등 컴퓨터 교육 분야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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