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대망의 70년대-전자계산부로 확장 (7)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산실 2호기 컴퓨터 「사이버(Cyber)72-14」는 3년 전인 69년에 도입됐던 1호기 「CDC3300」과 비교해서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다. 우선 용량에서 「사이버72-14」는 「CDC3300」의 3배나 됐고 가격도 1백75만 달러로 2.5배나 높았다.
월간 임대료 역시 1호기의 1만6천8백50달러보다 2배 이상 많은 3만5천 달러나 됐다. 「사이버72-14」의 이 같은 제원에 대해 당시 신문들은 『동양에서는 단 한 대뿐인 최신형』 『인간을 달에 보내는데 사용한 「IBM 360-75」보다 더 좋은 성능』이라고 표현했다. KIST 전산실 내부적으로도 「사이버72-14」의 도입은 71년 10월 과기처 산하의 중앙전자계산소(NCC)의 초대형컴퓨터 「유니백1106」에 빼앗겼던 국내 최고 기종의 위치를 다시 되찾아 왔다는 의미가 있었다.
「사이버72-14」는 지난 호에서 설명했던 대로 터미널서비스가 일품이었는데 도입 초기 호스트에 물린 터미널(단말기)수가 16대이던 것이 75년 말에는 1백대까지 증가했다. 이는 컴퓨터를 직접 도입하지 않고 KIST전산실의 「사이버72-14」의 컴퓨팅파워를 이용했던 기관이나 기업이 1백곳에 이르렀다는 얘기였다. 「사이버72-14」의 터미널서비스는 막대한 컴퓨터 도입비용을 절감시켜주는 효과를 냈다.
도입비용의 절감은 큰 의미가 있었다. 72년 우리 나라에 도입된 컴퓨터는 43대였고 같은 해 컴퓨터 임대료로 해외에 지불된 외화가 1천만 달러였다. 74년 들어 임대비용이 5천만 달러에 육박하자 컴퓨터가 무분별하게 도입되고 있다며 도입기종 심사를 전담하던 과기처 전자계산조직 개발조정위원회에 대한 비난이 집중됐다. 체신부가 월 4만 달러씩을 지불하는 「유니백1106」을 들여오고도 몇달째 운영조차 못하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쏟아진 것도 이때였다.
당시 컴퓨터 1대의 임대료는 최소 월 1만 달러가 넘었다. 하지만 KIST 전산실로부터 터미널 서비스를 제공받을 경우 전체 비용이 2백∼1천 달러(당시 환율로 8만원∼30만원 정도)로 한 사람의 인건비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받았던 기관과 기업들에게 있어 이때의 경험은 또한 나중에 컴퓨터를 자체 도입하게 됐을 때의 시행착오를 줄여주는 역할도 했다.
서비스에 이용된 터미널은 배치(Batch)형과 인터액티브(Interactive)형 등 크게 두 종류였는데 배치터미널의 경우 본체·카드판독기·라인프린터 등 3부분으로 구성돼 있었으므로 원격지의 호스트와는 2천4백∼4천8백bps급 모뎀을 통해 KIST 전산실 호스트에 접속할 수 있었다. 인터액티브 터미널은 다시 1백10bps급 텔레타이프라이터(TTY), 3백bps급 비동기식 CRT터미널, 2천4백bps급 동기식 터미널 등으로 나뉘었다.
일반적으로 배치형은 작업량이 많아 일괄처리(Batch Processing)가 요구되는 대규모 작업장에, 인터액티브형은 업무의 성격이 상호 대화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각각 설치됐다. 인터액티브형 가운데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이 TTY였다.
TTY에 관해서는 박정희(朴正熙)대통령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해인가 과기처 연두순시에 나섰던 박 대통령은 KIST 전산실에 연결된 장관실의 TTY를 통해 우리 나라의 소와 닭이 몇 마리인가를 조회해 보도록 했는데 즉석에서 답을 출력해내는 위력(?)을 발휘했다.
「사이버72-14」를 도입한 직후 터미널 서비스를 활용한 전산화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삼양타이어(현 금호타이어)·증권거래소·신탁은행·현대건설·한국기계공업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양타이어는 최초로 TTY를 이용한 전산화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광주(光州)에 본사와 생산기반이 있던 삼양타이어는 당시 대부분의 영업을 담당하던 서울 사무소 판매부가 광주본사의 재고를 매일 파악하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74년초에 시작돼 79년에 마무리된 삼양타이어 전산화는 기반조성을 위한 1단계, TTY를 도입하여 서울사무소의 판매전표와 광주본사의 생산전표를 입력하여 일간단위의 원격지 재고관리를 자동화한 2단계, 그리고 독자적인 전산시스템을 구축한 3단계로 나눠 진행됐다.
이같은 3단계 전산화를 통해 삼양타이어는 인력확보·운송비부담·산업기반시설·정보수집 등 지방 기업들이 겪어야 했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함으로써 내수와 수출 모두에서 한국 최고의 타이어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삼양타이어 전산화는 80년대에 의료보험 전국네트워크 구축에 밑거름이 됐다.
한편 1억∼2억원대에 머물던 KIST 전산실의 연간 프로젝트 수주규모가 4억원대로 훌쩍 상승한 것은 73년에 들어서면서였다. 이전까지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연구 개발 관행이 73년을 전후해서는 여러 개의 프로젝트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70명 선이던 전산실 연구원 수가 1백30명 선으로 증가한 것도 이때 부터였다. KIST입장에서는 기술지원부서였던 전산실이 업무와 조직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재편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73년 8월 3일 KIST는 마침내 66년 발족 이후 8번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개편 직전 KIST 조직을 보면 소장 아래 3부소장, 6연구부, 44실 체제로 돼 있었다. 제1연구담당 부소장은 화학·화공연구부(7실), 식품·사료연구부(5실), 공업경제연구부(3실), 직할 5개실 등을 맡았다.
제2연구담당 부소장은 기계금속연구부(9실), 전기·전자연구부(10실), 직할 3개실 등을 관할했다. 제3부소장격인 행정담당부소장은 행정관리와 사업관리를 맡았다. 이때 소장은 한상준(韓相俊, 한양대 명예총장), 제1연구담당 부소장은 양재현(梁在炫, 단국대 명예교수), 제2연구담당 부소장은 정만영(鄭萬永, 전 삼성반도체통신 부사장)이었다. 전산실은 제1연구담당 부소장 관할의 직할실의 하나였다.
73년 8월 개편에서 KIST는 3부소장 7부 44실 체제로 전환했다. 신설된 1개부가 바로 전산실이 확대개편된 전자계산부였다. 전자계산부는 연구부문을 담당하는 전자계산연구실과 기존 전산실처럼 기술지원을 담당하는 전자계산기운영실로 나뉘어졌다. 7부 가운데 유일하게 연구부문과 지원부문을 함께 갖춘 조직인 셈이었다. 전자계산부 부장은 부소장 양재현이 임시 겸임하는 체제였고 그 밑의 전자계산연구실 실장은 성기수, 전자계산기운영실 실장은 이용태(李龍兌, 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가 각각 임명됐다.
이용태는 미국 유타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직후인 70년 1월 KIST전산실에 책임연구원으로 특채됐다. 직급은 차장으로서 실장이던 성기수의 바로 아래 자리였다. 이용태의 임무는 처음부터 전산실 컴퓨터의 운영에 관한 부문이었다. 이용태는 성기수에 비해 나이도 한 살 더 많았고 학교(서울대)도 1년 선배였다. 물과 기름관계라는 세간의 풍문처럼 성기수와 이용태의 운명적 만남은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개편 이후 성기수는 전산실장으로서 프로젝트 수행과 소프트웨어 개발을, 이용태는 컴퓨터 하드웨어의 운영을 맡는 것으로 굳어지는가 싶었다.
상하관계가 수평관계로 바뀐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은 개편 전부터 컴퓨터 운영방식을 놓고 더러 마찰을 빚어 오던 터였다. 전산실장 시절 성기수가 차장 이용태를 불편하게 느꼈던 점 가운데 하나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내용이 언제나 한상준 소장에 의해 다시 유(U)턴돼 오곤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상준은 이용태의 유타대학 9년 선배였는데 이를 두고 당시 전산실 주변에서는 유타대학이 성기수의 출신교인 하버드대학을 샌드위치로 만들었다는 농반진반의 이야기들이 돌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양재현 부소장이 성기수의 적자 프로젝트 수행 관행을 지적하고 나섰다. 적자란 이를테면 1억원짜리 프로젝트에 2억원을 지출했다는 식이었는데 추가된 1억원이라는 것이 사실은 컴퓨터 사용원가, 즉 KIST 전산실의 내부계정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 비용원가 계산을 위해 시간당 컴퓨터 사용료를 손비(損費)처리한 것인데 양재현이 이를 지적하고 나선 것이었다.
KIST 조직개편 1주일 만에 성기수는 부소장 양재현에게 사표를 던지고 가족들과 함께 대천 해수욕장으로 여름휴가를 떠나버렸다. 결혼 9년 만에 가족들과 함께 처음으로 맞은 여름휴가였다. 그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프로젝트 수행으로 가족들에게 미안하던 터에 오히려 잘된 일인가 싶었다. 새로운 일을 찾는 것은 휴가를 다녀와도 늦지 않을 일이었다.
일주일 동안의 꿀맛 같은 휴가를 다녀온 다음날 짐을 정리하러 KIST에 들른 성기수를 양재현이 찾았다. 사표가 반려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기수는 실장에서 전자계산부를 책임지는 부장으로 승진발령이 나 있었다. 이용태는 전자계산부 소속의 전자계산기운영실 실장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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