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월드] "사이버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직접민주주의 "씨앗"

체코 프라하 근교의 작은 도시 프리브람(Pribram).

지난 8월 25일(현지시각) 이곳에는 정치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유럽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도 눈에 띠었다. 이들이 동유럽의 조용한 전원도시를 찾은 이유는 「제1회 직접민주주의 국제대회(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n Direct Democracy) 개막식이 열렸기 때문.

이날 행사를 주관한 단체는 전자민주주의에 관심이 있는 네티즌이라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TANN(Teledemocracy Action News and Network). 미국 알라바마주 오번 대학 교수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한 마디로 텔레데모크라시 운동을 위한 인터넷 실천본부라고 할 수 있다.

텔레데모크라시 운동이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그리스 시민광장 아크로폴리스에서나 가능했던 직접 민주주의를 21세기에 실현시켜 보자는 움직임. 그래서 행사명에도 세미나나 컨퍼런스가 아니라 「congress」, 즉 의회와 학술대회라는 중의적 표현을 썼다는 것이 주최측의 설명이다.

사실 직접민주주의 국제대회의 첫 번째 개최국이 체코, 그리고 행사장이 프라하 근교라는 것은 텔레데모크라시를 꿈꾸는 이날 행사 참가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체코는 동유럽 국가들 중에도 유난히 비극적인 역사를 지닌 나라.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싸움에 휘말려 전쟁의 포화가 끊일 날이 없었다. 그리고 동유럽의 파리로 불릴만큼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는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투쟁의 성전이다. 68년 당시 고색창연한 프라하성을 끼고 잔잔하게 흐르는 몰타바강에는 시위군중의 피가 뿌려졌고, 평화스러운 표정의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프라하의 명소 카를 대교(大橋)는 진압군이 몰고온 장갑차로 메워졌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에 의해 고통받았던 나라에서 21세기 전자민주주의 시대를 앞두고 진지한 토론을 벌인다는 것은 감회 깊은 일이다. 개회식을 위한 축하메시지를 보낸 하벨 체코대통령도 프라하의 봄이 이데올로기의 겨울로 변했던 그 해 12월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

오프닝 연설을 했던 사람은 인터넷에서 「사이버 테드」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오번대(Auburn University)의 정치학과 테드 베커(Ted Becker)교수. 그는 TANN의 설립 멤버로 다양한 전자자민주주의 프로젝트의 코디네이터로 명성이 높은 행동파 학자다. 「한 나라의 모든 권위는 그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명언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정치웹진 시티즌 파워(CITIZEN POWER)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3일간 다양한 주제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온라인 국민투표」 「21세기 타운미팅(Town Meeting)에 활력 불어 넣기」 「정책결정 과정에 시민의 여론을 수렴시키는 방안」 등이 심도깊게 논의됐다. 스위스, 독일, 스웨덴, 덴마크, 일본, 영국, 미국, 한국 등 유럽과 아시아 각국 전자민주주의 관련단체 실무자들의 사례발표도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이버파티(Cyberparty) 원성묵 사무국장이 참가해 PC통신과 인터넷을 이용한 가상정당 운영경험을 털어 놓았다.

어제(현지시각 27일) 폐막된 제1회 직접민주주의 국제대회는 각 나라별로 전자민주주를 주창하는 학계, 정계 인사 및 시민단체 실무자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초대된 네티즌들에게도 열틴 토론의 장이 됐다. 「사이버 국회부터 사이버 정당, 사이버 정치, 사이버투표까지 유행어는 난무하지만 현실세계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가상공간에서의 탁상공론이라면 필요 없다」는 회의론이 대두되는 요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만한 뜻깊은 행사였다.

<이선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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