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承基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지난 23일 강원도 문막으로 산악자전거를 타러갔다. 개강이 눈앞에 다가온 터라 비가 몹시 오는데도 불구하고 무리를 하면서 산행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산에서 내려오던중 자전거가 굴러 얼굴만 무려 스무 바늘 이상 꿰매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직후 원주시내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수술을 받게 됐는데 수술 후 마취가 덜 깨어 어정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에게 병원측은 보험카드가 없으므로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며 일단 현금으로 25만원을 내라면서 일주일 안에 보험카드를 가지고 오면 그때 가서 환불해 주겠다고 덧붙였다. 서울에 가서 보험카드를 가지고 원주까지 다시 오라는 말도 황당했지만 카드결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에는 한층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같이 산악자전거를 타러갔던 친구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간신히 25만원을 마련해 영수증을 받았는데 그나마 간이영수증이었다. 그날 밤 나는 얼굴이 부어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주민등록증 사진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의료보험조합 사무실을 찾아가서 급여제한여부 조회서를 작성했으며 그 다음날 보험카드와 조회서를 갖고 2시간 걸려 원주의 그 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현금만 받는 것도 「남들이 다 그러니까」로, 간이영수증을 발급하는 것도, 환자가 치료 후 보험혜택을 받으려면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는 것도 「선진국 같은 소리」라는 말 한마디로 넘겨버리던 그 병원의 원무과 직원은 태극기 달린 차를 타고 퇴근하는 것이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그 태극기의 펄럭이던 모습이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우리는 아는 의사가 있어야 병원에 갈 수 있다. 아는 변호사가 있어야 법률문제를 맡길 수 있으며, 하다못해 자기 집 지붕을 고치더라도 아는 사람에게 맡겨야 마음이 놓인다. 이 조그만 나라에서 아직도 경상도는 경상도이고, 전라도는 전라도다. 같이 사는 우리들끼리가 이럴 정도인데 외국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한국관광을 하려면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는 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병원이 잘 되려면 환자를 잘 돌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환자의 불편은 고사하고 탈세의 요령을 잘 터득해야 하는 우리네 실정에서 어느 외국사람이 우리 나라 병원에 투자를 하겠는가.
건국이래 계속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국민의 혈세를 탈취한 자들을 국민 대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방면하고, 그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지도층에 복귀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런 나라에 정당한 세금을 내고 돈을 벌겠다고 투자할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병원이란 무릇 유능한 의사들을 많이 확보하고 환자들에 대한 서비스가 남보다 좋을 때 장사가 잘 돼야 한다. 탈세로 돈을 버는 병원은 규모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환자들에 대한 서비스는 물론 의사들의 실력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 병원과 그 동네의 세무공무원은 많은 돈을 벌게 되겠지만 동네 주민들의 건강은 계속 나빠져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모두 가난해져 병원에 가더라도 낼 돈이 없게 되고 결국 그 병원 역시 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왜 우리가 IMF 경제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답이다. 정경유착과 부실금융은 분명 우리 규칙에 어긋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이들의 해결은 불가능했고 결국 IMF에 맡긴 꼴이 됐다.
오늘의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다같이 규칙을 지키고, 그 규칙을 위반한 사람들을 우리 힘으로 이 사회에서 추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진국들에 우리도 규칙을 지키는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에 너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외자를 유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의 상태대로라면 외국인들이 국내에 투자하지도 않겠지만, 혹시라도 선진국의 막강한 기업들이 국내에 들어와 우리가 하듯 정경유착에 의한 탈세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그들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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