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대망의 70년대-성기수식 프로젝트 (2)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산실이 「CDC 3300」 컴퓨터를 도입할 당시 성기수는 도입비용(예산)의 집행을 놓고 전산실장인 자신과 청와대 과학담당비서관 사이에 벌어졌던 마찰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웠다. 아무리 좋은 목표를 갖고 설립된 출연연구소라 할지라도 예산과 그 예산을 집행하는 권력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되면 한참 패기가 넘치는 젊은 연구원들의 연구의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성기수는 전산실이 추구하고자 하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출연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이는 결국 전산실이 조직적으로는 KIST에 소속돼 있지만 재정적으로는 독립을 꾀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같은 소신에 따라 전산실장 성기수는 초창기 전산실 운영 방향에 대해 두 가지의 원칙을 세웠다. 그 하나는 조직의 활성화를 위해 전산실 운영 과정에 민간기업의 경영방식을 도입키로 한 것이었다. 연구원들이 앞장서 외부에서 프로젝트를 유치(受託)해오기로 한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됐다. 전산실 연구원들 역시 프로젝트 유치를 위한 연구계획서를 수시로 제출하는 등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호응해왔다.
또 하나는 이른바 계약연구(Contract Research), 즉 수요가 있는 프로젝트만을 수행한다는 원칙이었다. 계약연구 방식은 처음부터 KIST 설립을 도왔던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 등 유명 연구기관에서 연구소 경영의 기본 틀로서 정착돼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용어조차 생소하기 그지 없던 개념이었다. 성기수는 모든 프로젝트의 수행은 실용성과 현실성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믿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또 궁극적으로 돈이 되지 않는 프로젝트는 기술의 진보도 기대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연구원들은 전산실이 이 두 가지 원칙에 의해 수행되는 프로젝트들을 특별히 「성기수식 프로젝트 수행방식」라고 표현했다. 「성기수식 프로젝트 수행방식」은 70년대 정착기를 거쳐, 부설연구소로 확대 개편되는 80년대에 이르기까지 KIS T전산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 연구소 운영철학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로부터 운영비를 비목별(費目別)로 출연받았던 다수의 출연연구소들과 달리 경직되거나 관료화하지 않고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전산실이 KIST부설 전산개발센터로 확대개편 된 82년 초 어느 날 성기수는 재정관리 책임자였던 송진원(宋鎭元, 한국기술진흥금융 상무)과 센터 운영방안에 대해 심도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날 송진원은 성기수에게 「성기수식 프로젝트 수행방식」의 수정을 정식으로 요구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82년은 정치와 경제적인 변수 때문에 과학기술정책이 최대의 시련기를 맞고 있었다. 이 대화록은 98년 현재 출연연구소들의 구조조정 작업에 시사하는 바가 커 소개한다)
▲송진원:소장님, 이런 상황에 이르고 보니 프로젝트 수탁 중심의 연구소 재정운영이 한계에 부닥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젝트 원가인 인건비와 직접연구비를 간접비와 함께 포함시켜 수탁비용을 계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차라리 운영비목에 따라 예산을 공식적으로 지원받는 편이 유리합니다. 더욱이 국책연구소로서 기능을 다하자면 다른 연구소들과 마찬가지로 운영비목별 정부 지원금 출연 폭을 키워 재정의 안정을 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장기적인 기반 연구개발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생깁니다.
▲성기수:프로젝트 중심과 운영비 중심의 재정을 병행하자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하지만 출연자 측이 연구소 경영에 깊은 소양을 갖고 출연과 수탁이라는 두 개의 재정 축을 각각 존중해 주지 않는 한 연구소는 자칫 관청화할 소지가 많아. 프로젝트 중심의 경영은 최소한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이상의 실적을 지향하는 자율성, 진취성의 속성을 갖는데 반해 운영비 중심의 경영은 상한을 정해 놓고 그 범위 안에서 관리하는 폐쇄성, 타율성의 속성을 갖거든. 대개는 두 개가 서로 범벅이 되다가 후자의 속성으로 전도돼 버리고 말아. 현실 관료집단에서 출연금이 철학적 바탕을 둔 규범에 의해 운영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매우 어려워. 두고 보라고, 운영비중심의 연구소들이 나중에 얼마나 경직되는가를, 그리고 정부는 이를 얼마나 짐스러워 하는가를...
KIST전산실은 「성기수식 프로젝트 수행방식」에 힘입어 출범 3년 만인 71년부터 지출 대비 수입에서 흑자 연구부서로 탈바꿈했다. 이는 성기수가 당초 예상했던 5년보다 2년이나 앞당겨진 것이었다. 71년 당시 35개가 넘었던 실(室)단위의 KIST 부서 가운데 흑자를 기록한 곳은 전산실을 제외하고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는 사실은 「성기수식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가를 입증해준 사례이다.
69년에 입소한 김길조(金吉助, 중앙대 교수)가 어떤 기고문에서 70년대 KIST 전산실의 모습을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고 표현한 대목은 「성기수식 프로젝트 수행방식」의 또다른 특성을 잘 나타내준다. 김길조에 따르면 「성기수식 프로젝트 수행방식」이란 프로젝트의 목표가 정해지면 성공적인 수행을 전제로 일단 밀어부친 다음 예정된 기간 내에 완료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인 뉘앙스를 주는 감도 없지 않지만 당시 상황으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정부 출연연구소의 한 조직인 KIST 전산실이 기관이나 기업의 전산화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었겠느냐며 반문하겠지만 당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90년대 이후의 업무 전산화는 워낙 정형화 돼 있어 웬만한 규모라 하더라도 시스템통합(SI)회사들이 알아서 척척 해내는 것으로 돼 있지만 적어도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정은 크게 달랐다.
우선 기관이나 기업마다 서로 다른 고유업무가 처음부터 전산화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수작업기반으로 굳어져 내려 왔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또 전산화과정에서 사례를 원용하거나 참고할 수 있는 참조(Reference) 사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접근 방법이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모든 과정은 처음부터 연구 조사대상이 됐다. 그러다 보면 전체 프로젝트 수행기간 중 현업 분석기간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로 말미암아 프로젝트 자체의 수익성은커녕 예산 범위 내에서조차 적자 운영이 불가피한 상황이 계속되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적당히 연구하고 결과물을 낸다고 해서 누군가 이를 비판하고 질책할 것도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KIST전산실 업무를 평가할 만한 전문가나 기관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프로젝트 발주자 입장에서도 앞선 사례가 없어 무엇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요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프로젝트 수행기간을 어림잡아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KIST전산실 역시 해당 프로젝트의 수행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따져볼 게재가 아니었다. 일단 프로젝트를 수주해놓은 다음 현업분석과 접근방법 그리고 개발 양식 등의 연구에 착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의료보험제도의 시행을 석 달여 앞둔 78년 9월 말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 토막이다.
어느 날 성기수가 과기처 차관 이창석(李昌錫, 97년 작고)의 요청을 받고 라이온스클럽 조찬회에서 컴퓨터 활용방안에 대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호텔 로비를 나서는데 조찬회에 참석했던 초대 의료보험관리공단이사장 진봉현(陳鳳鉉, 전 농림부 차관)이 황급하게 쫓아나오며 성기수에게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의료보험업무 개시 일이 꼭 1백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무런 경험이 없어 가입자 신상기록카드를 얼마나 구입해야 하는지조차도 모르겠으니 KIST 전산실이 어떻게 해서든 도와달라는 통사정이었다.
78년 8월에 출범한 의료보험관리공단은 관련법에 명시한 대로 79년 1월부터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제도를 우선 시행하기로 돼 있었다. 진봉현의 설명을 듣고 즉석에서 어림잡아 보니 의료보험의 전산화 작업은 3년은 족히 걸릴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성기수는 대국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복지선진화라는 차원에서도 의료보험전산화는 해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성기수는 의료보험관리공단 측과 1년 안에 모든 전산화 업무를 완료키로 하고 우선 개시 일부터 당장 사용할 수 있도록 편법으로 구축한 데이터베이스 하나를 건네줬다. 공단 측과 병원간 보험급여 계산관계는 어차피 연말에 정산(精算)할 것이므로 당장 사용되는 데이터베이스의 신뢰성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성기수는 병원 측이 청구해오는 금액은 무조건 지불해도 된다며 공단 측을 안심시킨 뒤 79년 1월부터 본격적인 의료보험전산화 작업 독려에 나섰다. 보험가입자의 신상기록카드 데이터를 입력하는 데만 3년이 소요될 업무를 1년만에 완성하기 위해 전국의 카드천공용역회사들을 모두 동원하고 그것도 모자라 하루 3교대로 시간을 댔다. 그렇게 1년을 꼬박 세워 추진한 의료보험전산화는 80년 1월부터 성공적으로 현업에 배치됐다.
<서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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