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26)

제6부 대망의 70년대-대통령 박정희 (1)

한국 현대사에서 70년대는 이른바 「근대화」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당시 「근대화」와 동일시되던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제자립」이었고 그 뜻은 다시 「개발」 또는 「수출지상주의」와 같은 경제행동 양식으로 나타났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이 「경제자립」이 과학기술로부터 비롯된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념은 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설립으로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노정(路程)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 가운데 하나가 중견과학자 최형섭(崔亨燮)의 중용이다.

최형섭은 박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66년 초대 소장으로 발탁돼 71년까지 5년 동안 KIST의 토대를 닦아 놓았다. 이어 최형섭은 곧바로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승진, 78년까지 무려 8년 동안 재임했다. 8년은 역대 최장수 장관재임기록에 해당된다. 최형섭은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일관된 과학기술 정책을 펼 수가 있었다. 함께 발탁된 과기처 차관 이창석(李昌錫, 97년 작고)은 한술 더 떠 79년까지 9년간을 재직했다. 이에 앞서 이창석은 66년 KIST 감사, 70년 KIST 부소장 등을 역임하면서 최형섭과 호흡을 맞춰 왔던 터였다.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이때를 한국 과학기술의 르네상스 시기라 일컫는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오늘날 중견, 원로 과학자들로부터 과학기술 발전의 본질을 진정으로 이해했던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다.

이 시절 박 대통령이 아끼며 중용했던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성기수다. 70년대 초반까지 박 대통령은 KIST를 수시로 방문함으로써 과학기술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널리 표명하곤 했다. 94년 발간된 「KIST 25년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67년에 2번, 68년에 3번, 69년부터 71년까지 2번씩 각각 KIST를 방문한 것으로 돼 있다. 이때마다 박 대통령은 성기수의 안내로 전산실을 방문하여 컴퓨터가 동작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성기수를 볼 때마다 주위사람들에게 『중학생처럼 생겼는데 머리는 꼭 컴퓨터처럼 명석하다』며 칭찬해주곤 했다. 두 사람간 마지막 만남이 돼버린 79년도 5, 16민족상 수상자를 위한 청와대 만찬에서도 박 대통령은 학예(學藝)부문 수상자 성기수를 이례적으로 꼭 껴안으며 예의 그 『중학생처럼∥』으로 서두를 꺼낸 뒤 『성박사! 나를 위해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일해 주시오』라며 애정과 관심을 표현해 주기도 했다.

성기수가 자신의 진면목을 박 대통령에게 보여 준 것은 70년 4월 6일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열렸던 경제동향 브리핑에서 였다. 대통령과 30여명의 장관급, 차관급 경제관료들이 참석한 이날의 브리핑 주제는 행정전산화와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NSA)를 본 뜬 과학원(科學院)설립의 필요성 등에 관한 것이었다. 행정전산화에 대한 브리핑 담당자로 성기수를 추천한 것은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 강경식(姜慶植, 국회의원)이었다.

강경식은 이때 KIST전산실 측 경제기획원 예산업무의 전산화작업을 진행 중이어서 성기수를 잘 알고 있었다(예산업무 전산화에 대한 얘기는 다음 호에 소개한다). 하지만 강경식의 추천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절차였을 뿐이었다. 사실 성기수가 이날 브리핑 담당자로 발탁된 것은 그로부터 열흘전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됐다.

개국 8개월째에 불과했던 신생 문화방송(MBC) 텔레비전은 당시 매주 수요일 저녁시간대에 「명교수 명강의」라는 45분 짜리 교양프로그램을 방영하여 특히 관료와 식자층에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명교수 명강의」는 정부의 경제자립정책에 부응하여, 과학기술계를 포함한 경제 분야 전문가들을 강사로 출연시켜 관련 토픽들을 강의하는 일종의 대국민 공개 경제강좌였다. 성기수가 진행할 토픽은 물론 컴퓨터 분야였다. 당시 국내에 도입된 컴퓨터는 15대 정도였고 일부 부문이나마 컴퓨터를 다뤄본 사람은 전국민을 통틀어 5백명 미만, 전산실 유리문 너머 컴퓨터를 구경만 한 사람조차도 5천명을 넘지 않던 시절이었다.

「명교수 명강의」에서 성기수는 컴퓨터 응용기술의 개발과 보급확대 필요성, 즉 정보산업의 육성을 역설했다. 컴퓨터가 주민등록업무, 여권발급업무 등 실생활 분야는 물론이거니와 경제계획 수립, 건설, 토목 등 산업 분야에서 합리적이고 혁신적인 생산성 향상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실례도 들었다. 이어 성기수는 정보산업의 육성은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진 대통령이 주도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은 이날 강좌의 하일라이트였다.

「명교수 명강의」 출연은 47년 대구사대부중 재학시절 은사(물리 담당)였던 이성조(李聖祚, 전 경북도교육감)가 주선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동창인 이성조는 5, 16재단이 최대주주였던 문화방송 경영진에도 동기생들이 포진돼 있어 발이 넓은 편이었다. 이때 이성조는 64년 한일회담(韓日會談) 반대시위때 경기고 학생들이 대거 가담했다는 이유로 경기고 교장직에서 물러나 덕수상고 교장으로 재직중이었다. 71년 덕수상고가 KIST전산실 지원을 받아 전국 최초로 고교생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게 된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70년 3월초 어느날 이성조는 성기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정보산업 발전을 위해 애쓰는 것은 다 알고 있네. 그런데 각하께서 아직은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TV에 한번 출연해 줄 수 없겠나. 「명교수 명강의」 프로 있지 않은가. 사실 그 프로는 각하의 경제 교양(敎養)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야.』

성기수가 「명교수 명강의」에서 강의한 내용은 당시로서는 놀랍고도 신기한 것들이었다. 막연하게 컴퓨터를 만능기계쯤로 이해하기는 식자층이나 관료집단, 일반 서민들이 매한가지였던 시절이었다. 방영 다음날 아침 성기수는 출근하자마자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청와대에 들어와서 비서실 직원들을 위해 「명교수 면강의」내용을 한번만 더 강의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복잡했다. 박 대통령은 그날 저녁 TV를 보며 강의 내용에 큰 관심을 나타낸 반면 비서실 직원들은 이를 시청하고도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이를 계기로 비서실 직원들은 수시로 KIST 전산실을 방문해서 성기수로부터 컴퓨터 특강을 들었다.

경제기획원 경제동향 브리핑은 이런 배경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이날 브리핑에서 박 대통령의 관심은 매우 진지한 것이었다. 성기수는 이날 브리핑에서 행정전산화에 대한 내용에 덧붙여 정보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공업고교와 상업고교에 전산교육 과정이 도입돼야 하며 컴퓨터를 이용한 실습이 병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기수는 몇가지 예를 들었다. 우선 공고생의 경우 실습실에 수치제어(NC) 공작기계를 도입해서 로봇 등을 직접 제작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며 포트란 언어를 배우면 학생들도 컴퓨터를 이용해서 로봇 설계도면을 직접 그려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상고생 역시 주판교육을 없애고 곧바로 전산교육을 도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회의장에는 습관적으로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은 채 브리핑에 열중인 성기수의 목소리와 그 내용을 노트에 꼼꼼히 적고 있는 박 대통령의 펜 굴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이 돌았다. 성기수는 학교 교육환경이 조기에 개선된다면 한국이 공업대국 서독(西獨)을 따라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박 대통령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박 대통령이 바로 뒷자리에 앉았던 문교부 장관 홍봉철(洪鳳哲)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보 홍 장관, 성 박사 말대로 지금 당장 시행할 수 있겠소?』

『각하, 그것이∥ 올해는 확보된 예산도 없고∥ 또 각급학교에 대한 전산교육이라는 것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성기수도 지지 않았다.

『지역별로 공동이나 시범 실습센터를 마련하면 큰 예산부담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결국 성기수의 손을 들어줬다. 브리핑이 있은지 3일뒤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 부총리 김학렬(金鶴烈), 과기처장관 최형섭, 그리고 홍봉철에게 친필서신을 내려보내 『예산이 아무리 많이 들더라도 상고에 전산교육을 도입하고 공동실습센터와 컴퓨터 시범 설치 학교를 지정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날 성기수의 브리핑은 대성황이었다. 경제기획원 관료들은 고급공무원들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대통령 앞에서 서슴없이 풀어놓는 성기수의 용기에 감탄하며 그를 극찬했다. 83년 버마 아웅산 폭발사건 때 순직한 전 경제부총리 서석준(徐錫俊)은 당시 약관 33세의 젊은 나이로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브리핑이 끝난 직후 대기중인 성기수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배님 정말 잘하셨습니다. 다들 칭찬하니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 점심을 대접하겠습니다.』

서석준은 성기수의 성주농고(星州農高) 4년 후배였다.

이날 점심시간 성기수가 서석준을 따라 소공동 조선호텔 뷔페식당에 간 사이 광화문 경제기획원이 발칵 뒤집혔다. 장관들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박 대통령이 경제기획원 전산실의 컴퓨터를 견학하고 싶은 생각에 안내자로 성기수를 찾았는데 그가 도중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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