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나라」로 들어가면 처음엔 낯선 풍경들뿐이다. 과거 속으로 날아가 불시착한 타임머신 속의 시간여행자처럼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말을 탄 남자들과 고대복장의 여자들이 바쁜 일도 없다는 듯 한담을 나누며 지나간다. 대장간은 칼을 갈려는 사람보다 긴 수염의 마법사로부터 「동귀여진」 「선더볼트」 「헬파이어」 같은 희귀한 이름의 도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로 붐빈다. 십자로 갈라진 도로표지판은 「국내성」과 「부여성」을 가리키고, 「왈숙네」 「연신네」 같은 주막집들이 보인다. 날이 어둑해지면 봇짐을 진 여행자들이 성근처로 몰려들어 흥청거리는 술판을 벌인다.
혼자서 길을 걷다보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상냥하게 말을 건네온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유리왕이 다스리는 고구려라고 가르쳐준다. 가끔은 푼돈을 뺏으려는 사기꾼이나 턱없이 비싼 고물을 파는 장사치를 만나게 되니 조심하라는 말도 일러준다. 치안이 워낙 잘돼 있어 이런 사람들은 대개 감옥에 가거나 추방당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안심할 순 없다. 도심을 벗어나 길을 잃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얼음의 땅에서는 하얀 털의 호랑이들에게 허겁지겁 쫓겨야 하고 계곡을 지나 수정동굴로 가면 편히 쉬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이 기다린다. 깊은 숲에선 덤불 속에 숨어 있던 검은 늑대들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모험을 끝내고 돌아오면 다시 평화롭고 행복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픽 머드게임 「바람의 나라(The Kingdom of The Winds)」는 이처럼 멀티 채팅이 가능한 사이버 스페이스다. 인터넷(www.nexon.net)으로 접속한 세계 각국의 게임 마니아들이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요즘엔 자고 일어나면 생기는 것이 네트워크 게임 사이트지만 대부분 끔찍한 살육과 전쟁을 다루고 있어 가족들이 함께 즐길 만한 작품은 드물다. 심지어 지휘관이 되어 적군을 몰살시켜야 끝나는 게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다. 전세계적으로 네트워크 게임 붐을 불러일으킨 「울티마 온라인」만 해도 기성세대들이 보면 눈에 거슬릴 만한 선정적인 화면이나 폭력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30초에 한번씩 폭탄이 터지는 할리우드 액션영화가 극장가를 점령하듯 네트워크 게임의 주류도 역시 이런 게임들이다.
그에 비하면 「바람의 나라」는 뚜렷한 줄거리도 없이 밋밋하게 흘러간다. 무시무시한 모험의 세계로 가려면 네트워크 기능이 지원되는 중세풍의 롤플레잉 PC게임이 훨씬 재미있다. 알고보면 이 작품의 진짜 묘미는 세계 각국의 친구들과 그래픽 공간에서 멀티 채팅을 하는 것. 전지전능한 신이나 흰 수염의 도사가 나와 신비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 게임의 기본골격은 우리의 현실 세상을 고스란히 흉내낸 거대한 사이버 스페이스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귀고 결혼해서 살림까지 차린다. 처음 본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얘기를 어수선하게 늘어놓는다는 점에서 언뜻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아트필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지난 1일부터 유료사이트로 전환한 이 게임의 회원들은 현재 1천여명. 시범서비스 기간에 ID를 발급받은 약 2만명의 게이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지만 바람의 나라 시민에게 주는 각종 권리는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이들 불법체류자(?)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유료화를 당장 폐지하라」고 쓴 협박성 피켓을 흔들거나 「제발 쫓아내지 마셔요」 같은 애원조의 구호를 외치며 희한한 풍속도를 연출한다.
바람의 나라처럼 컬러 그래픽 환경에서 멀티 채팅을 지원하는 네트워크 게임 덕분에 요즘은 「신남녀 칠세부동석 시대」라는 말이 실감난다. 옛날처럼 남녀가 나란히 앉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사이버 스페이스 덕분에 지구편 저쪽의 친구들과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선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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