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KIST전산실의 발족-전산실 확장 (4)
옛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지금의 홍릉(洪陵)단지 시대를 맞이한 것은 68년 8월이었다. 67년 10월 첫 삽을 떴던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39번지 일대의 제1차 연구동(硏究棟) 신축공사가 10개월여 만에 마무리된 것이었다. 66년 2월 정식 출범한 이래 KIST는 서울 종로 2가에 소재한 YMCA빌딩의 4∼5개층을 임대해서 사무실 겸 연구실로 쓰고 있었다. 67년 9월 발족된 성기수의 전산실도 같은 빌딩 5층을 사용하다 KIST본부를 따라 함께 홍릉단지로 들어갔다.
홍릉시대가 개막되면서 전산실은 본격적인 실무조직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실무조직을 갖추기 앞서 성기수는 우선 요원(연구원)의 선발부터 서둘렀다. 무슨 일을 시작하던간에 사람이 필요한 것은 매한가지일 터였다. 그때까지 전산실은 실장 성기수 외에 68년 1월 특채된 안문석(安文錫, 현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장), 이명재(李明宰, 현 부산대 교수), 이승윤(李承允, 전 아시아개발은행 이사, 작고) 등 세 사람과 타자수 겸 여비서 한 명 정도였다. 이들을 통해 전산실 조직의 틀은 어느정도 마련됐으므로 이제는 현장에서 직접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성기수를 제외하고 KIST 전산실에 다섯번째로 들어온 사람이 바로 이춘희(李春姬)이다. 전산실 초창기, 이춘희는 전산실장 성기수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춘희는 현재도 KIST 전산실의 후신인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에서 31년째 근무하고 있는 최장수 책임연구원. 동시에 60년대 입소한 유일한 연구원이기도 하다. 이춘희가 성기수를 처음 본 것은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서 근무하던 68년 봄이었다.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은 당시 국내 최초로 도입한 컴퓨터 「IBM 1401」을 이용해서 66년 실시됐던 간이 인구센서스를 처리 중이었는데 여기서 이춘희는 천공카드시스템(PCS: Punched Card System) 분야의 실무책임자였다. 지금은 과학박물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구시대 유물이 돼버렸지만 PCS는 터미널이나 PC가 보급되기 전인 60∼70년대 컴퓨터 시스템 환경에서는 없어서는 않될 주력 데이터 입출력용 보조 장비였다.
당시 컴퓨터들은 소정의 종이카드에 뚫려있는 천공(穿孔:구멍)의 배열 형태를 검출하는 방법으로 데이터를 읽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천공의 다양한 배열형태가 데이터의 값이며, 종이카드에 구멍을 뚫어주는 기계가 바로 PCS였다. PCS 기계를 이용해서 종이카드에 구멍을 뚫는 천공작업을 했던 이들을 천공수 또는 키펀처(Key Puncher)라고 불렀는데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천공작업은 사실 말 그대로 종이카드에 구멍을 뚫어주는 단순노동이었지만 정보처리에서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 60∼70년대 도입된 컴퓨터의 수명이 대개는 10년 내외였으므로 80년대 초반까지도 키펀처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키펀처들 스스로도 최첨단 직종에 종사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주된 천공용역이 소프트웨어의 수출로 알려지던 70년 초반부터는 수출역군으로서의 긍지도 높았다.
천공용역 수출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74년의 경우 수출액이 4백68만 달러를 기록한 적도 있었다. 같은해 전체 수출액이 44억 달러였으므로 천공용역이 차지한 비율은 1%가 넘었던 셈이었다. 수출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3공화국 정부는 천공용역이 초기투자만 필요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판단하고 그 육성을 적극 권장하기도 했다. KIST 전산실도 70년대 중반 한때 임시직이긴 했지만 수백명의 여성 키펀처들을 고용한 적도 있었다.
이춘희가 근무하던 68년 당시 경제기획원은 조사통계국 산하 IBM 1401 전산실에 여러명의 키펀처를 두고 있었다. 68년 봄부터 성기수는 KIST 전산실의 업무를 대외에 알리고 동시에 연구원들의 실무경험도 쌓을 겸 규모가 작은 몇 건의 전산용역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주한 미8군의 데이터처리 용역이었는데 규모나 내용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이때 KIST전산실은 성기수를 포함 5명으로 구성된 초미니 조직인 데다 컴퓨터는 커녕 단 한대의 PCS도 갖춰지지 못한 상태였다. 성기수가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는 세 명의 여성 키펀처를 데리고 미8군 용역일을 시작한 것은 68년 6월이었다. 당시 키펀처 파견을 성기수에게 주선해준 사람이 이춘희었다.
성기수는 전산실이 홍릉단지로 이전하기 직전 68년 7월 YMCA사무실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이춘희를 KIST전산실로 스카웃하는데 성공했다. 전산실이 홍릉단지에 입주하자, 성기수는 곧바로 별도의 천공실을 설치하고 이춘희에게 조직과 운영을 담당하는 천공실장 임무를 맡겼다. 이춘희는 성기수의 의도와 바램대로 자신이 근무했던 경제기획원 천공작업실의 제반 규범을 참고하여 KIST전산실내 PCS장비를 도입하고 키펀처 요원들의 확보에 나섰다. PCS장비로는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IBM 029」 천공기(Punch)와 「IBM 059」검공기(Verifier) 각 10대씩이 임대방식으로 도입됐다. 20명의 키펀처 요원들은 적성검사와 영어시험을 거쳐 선발했다.
성기수가 전산실의 실무조직체계를 갖추는데 PCS장비와 키펀처 요원의 확보를 우선 과제로 생각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천공용역을 KIST전산실 설립 목적 가운데 하나로 정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천공작업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것은 본격적인 컴퓨터시스템의 도입, 즉 69년 6월 초대형컴퓨터 「CDC 3300」을 들여오기 위한 전초 과정이었다. (CDC3300의 도입 과정은 다음호에 소개한다)
KIST전산실이 60년대 준비작업을 거쳐 70년 이후 한국의 정보산업 역사에서 굵직굵직한 획을 그었던 대형 프로젝트들, 예를 들어 경제기획원 예산업무전산화, 서울시 전화요금고지서 전산화, 중학교무시험추첨 전산화, 대학입학 예비고사채점전산화, 전매행정전산화 등을 수행하는 데 있어 천공작업실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나중에 차례로 소개하겠지만 이들 프로젝트의 성공은 척박하기 이를데 없었던 70년대 한국의 정보처리 기술 수준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 있었던 당시 한국의 경제사회 전반을 선진국형으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춘희에 이어 69년 말까지 KIST전산실에 입소한 사람들은 키펀처들을 제외하고 김길수(金吉洙, 68.7 현 삼도데이타시스템 대표), 최덕규(崔德圭, 68.8 아주대 교수), 황규복(黃圭輹, 68.9, 현 한국부가통신회장), 유완영(柳完英, 68.10, 현 LG정보통신 전무), 김길조(金吉助, 69.1, 중앙대 교수), 민병민(閔丙民 69.7, 현 아남반도체 전무), 오길록(吳吉祿, 69.7, 현 시스템공학연구소 소장) 등 연구원급 이상만 20명이 넘었다. 기존 연구원들과 키펀처들까지 포함하면 50여명, KIST전산실은 이미 웬만한 중소기업을 능가하는 조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성기수가 전산실 연구원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따진 것은 응시자들의 우수한 두되 즉, 수재성이었다. 수재성의 기준은 미국의 대학원 입학시험(GRE)과 같은 형식의 입소시험과 적성검사의 성적이었다. 영어로 된 GRE문제는 미국에서 구입해온 텍스트를 토대로 성기수가 직접 출제했고 적성검사는 PCS장비를 공급한 IBM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연구원을 선발하는 기준에서 응시자의 전공은 두번째라는 것이 성기수의 지론이었다.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같은 분야는 창조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가 적격이라는 것이었다. 응시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적성검사를 치르게 한 것은 바로 이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사상적으로, 도덕적으로 특별히 기피할 만한 이유가 없다면 선발해서 가르쳐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언제나 KIST 인사담당자에게 『사람이란 어떻게 훈련하고 노력하게 하고 활용해 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라고 강조하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이춘희가 입소할 당시 KIST의 연구원 입소자격 가운데 하나는 경제나 이공계열 출신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KIST 총무과에서 입소서류를 작성하는 도중 문과계열 전공이었던 이춘희의 입소자격이 문제가 됐다. 이미 이런 사태를 예감한 성기수가 즉석에서 입소서류의 부전공난에 「전산」이라고 써넣어 준 일도 있었다.
지난 90년 작고한 유락균(柳諾均, 전 데이콤 본부장)은 명문대학의 총학생회장을 지낸 수재였지만 재학중 학생시위 전력 때문에 취직이 여의치 못한 처지였는데 성기수에게 발탁된 경우였다. 72년 초 입소한 유락균은 전산실 업무의 특성상 해외출장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해외여행의 결격사유 즉, 시위전력 때문에 번번이 좌절되곤 했다. 이 때문에 유락균은 항상 수심에 찬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성기수는 평소 안면이 있던 공군 선배이자 체신부 장관을 지냈던 신상철(申尙澈)에게 부탁, 유락균의 해외출장을 가능하도록 해줬다. 신상철은 61년에도 현역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좌초될 뻔했던 성기수의 하버드대 유학을 가능케 해준 인연을 갖고 있었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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