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아시아 IT시장을 가다 (하)

베트남편-시장선점 만이 살길이다

세계 경제흐름에 민감한 이들은 최근 아시아지역에 흐르는 이상기류를 눈여겨 보고 있다.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그간 뭉칫돈이 몰렸던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경기가 예전같지 않은 것은 물론 돈이 점점 「빠지는」 추세가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로섬 원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 돈은 분명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가게 마련이다. 투자가들이 돈을 뺐다면 더 수익이 많이 나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상례다.

베트남이 최근 급부상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 해외업체 입장에선 아직까지 아시아지역만큼 투자잠재력이 높은 지역은 없다고 느끼고 있다. 따라서 후진국의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정국불안이 없으면서 양질의 노동력을 보유하고 개발의지가 높은 지역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베트남을 최적의 투자지역으로 꼽게 된다는 설명이다.

외향적으로 보면 아직 하노이를 비롯한 베트남의 도시들은 우리나라의 60년대 말을 연상시킬 정도로 초라하다. 하지만 그 어느 동남아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감과 활기가 거리 곳곳에서 넘친다. 구미 열강과의 오랜 전쟁이나 민족전쟁의 상흔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제 베트남은 공산국가나 저개발국의 이미지보다는 인구 8천만명에 이르는 양질의 노동력을 갖춘 엄청난 잠재력의 나라라는 것만을 해외업체에 느끼게 해줄 뿐이다.

IMF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해 말 시스템통합(SI)을 비롯한 국내 IT업체들도 자구방안으로 가장 먼저 모색했던 방향이 해외시장 개척이었다. 내수시장은 투자위축으로 뒷걸음질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가장 많이 고려됐던 지역이 바로 동남아였다. 여기에는 우리 기술로 시장을 리드할 만한 곳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많이 작용했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은 대다수 업체들이 꼽은 1순위 시장이었다. 우리를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돼있고 시장선점효과가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또 데이콤, 한국통신, LG 등 통신장비업체들이 진출해 빠르게 자리잡은 것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좀 다른 얘기지만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근면성이 몸에 배있고 손기술을 비롯한 노동력이 양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다 경제 고도화를 바라는 의지도 강해 마치 「새마을운동」 당시의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다.

구엔틴 넉 「국가정보화 위원회」 부회장은 『베트남이 74년 통일 후 줄곧 견지해온 정책이 정보화다. 국민을 한번에 결집시키는 데 통신인프라 구축은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지난 93년부터 국가정보화 전략을 수립해 전세계 업체를 대상으로 시장을 개방하고 정보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밝힌다.

IBM 같은 업체들이 민족전쟁이 막 끝난 75년부터 베트남에 진출한 것을 보면 넉 부회장이 설명한 대로 베트남의 정보화 의지는 대단한 수준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베트남이 해외 IT업체들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86년 말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흔히 도이모이로 불리는 시장경제정책이 도입되면서부터다. 이후 오라클, MS, 인텔 등 세계적인 IT업체들이 베트남 시장선점에 속속 가세했다.

미국업체를 중심으로 한 선진 IT업체들은 이처럼 이미 10여년 전부터 교육기관 설치, 연구소 무료 툴 제공 등을 앞세워 베트남에 선투자를 감행해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업체들이 그렇게 공들인 베트남이지만 정작 베트남측은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베트남 순수 로컬업체로는 가장 큰 규모인 FPT사의 부이쾅 넉 부사장은 『미국 등 선진 외국업체와 거래하면 유연성(플렉시빌리티)에 대해 불만이 많다. 외국업체들은 움직이면 돈이다. 조금난 잘못돼도 컨설팅비, 소프트웨어료, 기술료 등 뭐든지 돈을 챙겨 가려고만 한다. 하지만 아직 베트남 업체들은 이런 것까지 다 지급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고 토로한다. 이 때문에 가장 많은 선투자를 감행한 미국업체 가운데 금융권 사업에서 수주에 성공한 업체는 유니시스 정도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넉 부사장의 얘기는 마치 IT산업의 맹아기였던 70년대 우리가 느꼈던 무지함(?)과 흡사하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은 우리가 베트남에 뿌리내릴 수 있는 단초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업체가 지명도나 객관적인 기술경쟁력에서 외국 선진업체들과 해외시장에서 싸워 이기기는 어렵다.

최근 베트남 통신 SI시장을 대상으로 프로젝트 수주에 나서고 있는 국내 중견 S업체의 한 임원은 『아직 통제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아 결정단계가 복잡하고 기술수준도 우리의 제안서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것이 사실』이라고 진단하면서도 그러나 정보인프라 투자의지가 강해 향후 많은 수주물량이 쏟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망했다.

그는 그러나 『프로젝트 수준 측면에서만 본다면 우리도 베트남과 같은 시기를 얼마 전에 거쳤기 때문에 해외업체에 비해 「눈높이」 교육 내지 지원에서는 더 앞설 수도 있다』고 말한다. IT시장 경쟁력의 주요인인 커스터머 서비스 경쟁에서 해외업체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삼성물산의 베트남 현지법인장인 장훈채 이사도 『우리는 해외 선진업체와 비교해 해외사업 경험이 적은 데다 후발주자라 현지 협력처와의 관계도 약한 편이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현재 추진중인 국가정보화 프로젝트 수행경험이 있고 정서 면에서 미국업체보다 더 고객의 요구를 이해하는 적응력이 빠르다』고 밝혔다.

부이쾅 넉 FPT 부사장은 『베트남의 IT시장은 금융분야로부터 시작해 관공, 재무분야로 확산될 것으로 보이고 모든 대형 프로젝트는 당분간 정부 주도로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고 설명하면서 현재 베트남에는 10개 정도의 SI업체가 활동하고 있어 이들 업체와의 협력관계 구축을 통해 진출할 경우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조언한다.

특히 현재 통신분야에 집중되고 있는 경제개발협력기금(EDCF) 지원을 활용해 수주활동에 나선다면 베트남 정부측의 호응이 높을 것으로 내다봤다.

베트남은 국가 주도의 정보인프라 구축계획을 앞세워 동남아 IT산업의 패권을 꿈꾸고 있다. 이에 따라 전에 볼 수 없던 강도로 적극적인 외자유치를 통해 산업구조의 변화를 모색중이다. 비록 아직까지 소형 컴퓨터 활용이 대부분이지만 97년 인터넷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IT산업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현지 주재원들은 『베트남의 지정학적 위치와 시장잠재력 등을 감안할 때 해외진출을 서둘러야 하는 국내 IT업체 입장에선 결코 놓쳐서는 안될 시장』이라고 강조하며 『현지 업체들의 협력 하에 각종 툴과 교육프로그램 제공 등 과감한 선투자가 필요하다』는 지배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김경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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