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직원보다 두 시간 일찍 출근해 컴퓨터부터 켜는 K씨.
넷스케이프 아이콘을 클릭하는 순간 자동으로 야후의 페이저 서버가 접속된다. 야후페이저란 웹에서 주고 받는 쪽지편지. 채팅룸에 있건 서핑중이건 미리 등록해 놓은 친구가 1대1 대화를 원할 땐 신호음과 함께 편지지가 열린다. K씨는 E메일부터 체크해보고 다급히 채팅룸으로 간다. 수많은 방들 중 한국인 대화실의 문을 연 K씨는 쉴새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단어의 물결에 한순간 현기증을 느낀다. 그러나 곧 능숙한 솜씨로 손가락 끝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오늘의 화제는 「붉은 악마」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역전패를 당한 월드컵 축구. 얘기를 나누던 중 부산의 초등학교 여교사와 말이 통한다고 느낀 K씨는 펜팔을 통해 좀더 속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신의 야후 E메일 주소를 알려주고 대화실을 나온다.
이번엔 네트워크 게임사이트로 옮겨간 K씨. 그래픽 머드게임을 한참 즐기고 있을 때 낯익은 얼굴이 다가온다. 고대여인의 치마 저고리 차림을 한 왈숙이라는 이름의 캐릭터는 바로 집사람이다. 아내는 퇴근할 때 사와야 할 물건의 리스트만 전해주고 설거지를 해야 한다며 서둘러 퇴장한다.
그때 「딩동」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칭 사이버 베아트리체 강씨가 접속했다는 신호다. 그녀는 결혼하자마자 이민을 떠난 뒤 한번도 서울에 못다녀갔다는 40대 중반의 아줌마다. 반가운 마음으로 「Reply」 버튼을 누르자 두 사람만의 대화가 시작된다. 영어를 배워볼 요량으로 K씨는 서투른 영문 키보드를 두드린다.
『R u there(거기 있어요)?』라고 말을 건내는 K씨.
남편과는 친구처럼 지내지만 아이들이 속을 썩인다는 강씨의 푸념을 들어준 K씨는 빅딜로 어수선한 한국의 경제와 서울역 노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동안 풀어놓는다. 어느새 간부회의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I will be back ASAP(곧 돌아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아쉬운 듯 회의실로 향한다.
중년층에도 「접속」바람이 불고 있다. 아침마다 6시 30분에 출근한다는 어느 대기업 간부의 경험담처럼 나이 지긋한 기혼 남녀들이 E메일부터 채팅, 그래픽 머드게임까지 가상공간을 누비고 다니는 것.
대학가의 접속열풍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처럼 아줌마, 아저씨들이 연출하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신 풍속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려서부터 네트워크와 친숙한 이른바 W세대(Wired Generation)도, 컴퓨터를 장난감으로 알고 자란 컴키드(Com Kid)도 아닌 중년층이 키보드 대화에 빠져든 데는 야후와 통신 에뮬레이터의 공로가 크다.
특히 어제의 컴맹을 오늘의 채팅 마니아로 변신시킨 주역은 밋밋한 검색엔진에서 화려한 엔터테인먼트 사이트로 확 바뀌어버린 야후. 인터넷에는 「월드와이드 매치 메이커」 「와우클럽」 「사랑이란」 등 인기 채팅사이트들이 많지만 중년층이 활보할 만한 곳을 찾기는 힘들다. 신세대들의 대화방에 잘못 끼어들면 공개적으로 구박을 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워낙 넓고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드는 야후 채팅룸은 아줌마, 아저씨들도 부담없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 야후는 직관에 의한 메뉴 선택만으로 채팅(Chat), E메일(Free Email), 삐삐(Pager) 3가지의 무료서비스를 제공해준다.
PC통신으로 만남을 시도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국내 4대 PC통신 업체들이 「이지링크(하이텔)」 「천리안98(천리안)」 「웹프리(나우누리)」 「유니윈98(유니텔)」 등 쉽고 편리한 전용 에뮬레이터를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혼동스러운 영어 약자를 외워야 통신을 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젠 마우스로 모니터 위의 그림만 찍으면 누구나 쉽게 채팅을 할 수 있는 윈도형 프로그램이 나와 있는 것. 또 10대와 20대의 전유물이었던 PC통신의 이용자층이 30대와 40대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덕분에 부하직원들 눈치 보며 채팅방에 들락거리는 직장 상사, 남편이 나가자마자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는 엄마, 몽유병 환자처럼 자다 말고 일어나 E메일을 체크하는 아버지, 집안 청소에는 관심이 없고 서핑만 즐기는 주부 등 접속을 꿈꾸는 중년을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사회 일각에서는 이같은 중년의 접속바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사실이다. 통신의 익명성과 어딘지 몽환적인 분위기 탓에 컴퓨터 밀애를 즐기다가 실제 외도로 이어지거나, 사회적 신분을 숨긴 채 낯뜨거운 농담을 주고 받고, 심한 경우에는 매춘의 수단까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컴섹스」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외국에서는 사이버 애인 때문에 이혼을 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의 접속은 대부분의 중년에게 닫힌 사회구조 속에서 밀폐된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고, 지친 일상의 상처를 위로받으며, 때로는 부부 사이의 얽힌 매듭을 풀어주기도 하는 건전한 취미생활이 되고 있다.
남들의 빈축을 사건 말건 이미 채팅에 중독된 중년 남녀들은 편지만 나눈 채 끝내 만남을 사절한 차이코프스키와 어느 부인의 플라토닉 사랑을 그리며 오늘도 통신망을 넘나든다.
<이선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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