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실리콘밸리] 어느 연구원의 24시

오전 8시-새너제이의 아담한 2층 건물로 들어서는 N씨(36)의 얼굴엔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숙소가 있는 쿠퍼티노에서 이곳 사무실까지는 차로 약 30분 거리. 현지인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밤 늦게까지 일하기 때문에 평균시속 37마일에 불과하다는 101번 고속도로의 악명 높은 러시아워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드문드문 전차가 다니는 것 이외에 별다른 대중교통 수단이 없는 실리콘밸리에서 항상 미니밴으로 움직이는 그에게는 마치 출정을 앞둔 병사처럼 결연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사실 이 도시는 「Sleepless Battlefield(잠 없는 전쟁터)」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곳. 총대신 비즈니스 플랜을 들고 현대판 엘도라도를 꿈꾸며 서부로 몰려든 창업자들, 밤이면 스탠퍼드대학 근처 카페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는 개인투자자(Angel)들, 그리고 미국내 최상류층인 변호사와 컨설턴트, 회계사들로 북적거리는 거대한 휴먼풀(Human Pool)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누구라도 편안히 잠을 자거나 한눈을 팔면 낙오자가 되고 만다.

그래서 오늘처럼 인포메이션 데스크의 여직원까지 쉬는, 건물 전체가 텅텅 비는 토요일에도 그는 아침 8시면 어김없이 출근한다.

오전 10시-그는 틈틈이 본사에서 보내온 E메일을 체크하는 것만 제외하면 커피 브레이크를 가질 틈도 없이 어셈블러와 C를 오가며 프로그램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여기는 뛰면서 생각해도 늦고 뛰고 난 다음 생각하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로 신기술의 변화속도가 빠른 곳이다.

소프트웨어업계의 거인들이 버티고 있는 이 곳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시장을 개척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은근과 끈기에 꼼꼼함까지 갖췄다는 평을 받는 한국출신 엔지니어답게 소프트웨어 개발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정작 어려운 것은 경영학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비즈니스 플랜을 만드는 일이다. 이미 몇번씩 고쳤건만 아직도 포커스가 정확하지 않다는 벤처도우미업체의 조언에 따라 그는 이번 주말 밤을 새며 비즈니스 플랜을 손질할 계획이다.

인텔사나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인정받았던 경력을 가지고 신생업체를 차렸다면 유능한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줄을 서겠지만 무명의 엔지니어가 샌드힐가의 벤처캐피털리스트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 스탠퍼드대학의 인맥을 동원한다거나 한눈에 돈냄새가 나는 비즈니스 플랜을 들이밀지 않는 한 벤처자금은 그림의 떡이다.

7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쉴 틈 없이 프로그램을 짜며 오전시간을 보낸 그는 모처럼 외식을 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선다. 평소 집에서 손수 만들어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그에게 토요일마다 사먹는 자장면이나 월남국수는 별식이다.



오후 2시-그가 살고 있는 쿠퍼티노 지역은 실리콘밸리에서도 주택임대료가 비싼 곳. 하루 6달러를 받는다고 이름 붙여진 「모텔6」의 숙박비가 50달러를 호가하고 지난해 1천달러 안팎이던 원룸 아파트 월세가 1천6백달러로 치솟았다. 그래도 그는 무리를 해가며 헬스센터와 게스트하우스까지 딸린 주택단지에 아파트를 얻었다. 낯선 땅에서 하이테크 전쟁을 치러야 하는만큼 체력단련을 소홀히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마켓에 들러 1주일치 장을 보고 돌아온 그는 짐을 풀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잔디밭으로 나간다. 실리콘밸리로 모여든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거나 테니스 코트에서 한바탕 땀을 흘리고 돌아오면 일주일 동안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가 풀리기 때문이다.

오늘은 시간당 1백달러의 비싼 수업료를 내고 영어회화를 배우는 날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에는 불편이 없지만 앞으로 현지 투자가들과 상담을 하려면 능숙한 영어구사는 필수조건이다. 집으로 돌아가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잠들기 전까지 그는 또다시 프로그램에 파묻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새벽 1시-N씨는 오늘 실리콘밸리가 초신성처럼 폭발하는 꿈을 꾼다. 팰러앨토에서 시작된 하이테크 혁명은 마치 거대한 별의 폭발처럼 엄청난 속도로 번져나가며 끊임없이 새로운 성공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MIT와 하버드를 둘러싼 루트128 하이테크 벨트를 거쳐 미 항공우주국(NASA)이 위치한 텍사스주의 실리콘랜드, 노스캐롤라이나의 리서치 트라이앵글을 지나 마침내 멀리 스코틀랜드의 실리콘글랜까지 굉음이 이어진다. 이 신기술의 초신성이 폭발을 멈추지 않는 한 N씨에게도 정보시대의 영웅 테크니컬 위저드(Technical Wizard)를 향한 꿈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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