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제3공화국과 경제개발-스타탄생 (3)
미국에서 금의환향한 성기수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64년 5월 26일자 「한국일보」의 인물탐구 기획시리즈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기사가 계기가 됐다.
하버드대학 유학스토리를 중심으로 한 면의 3분의 2나 되는 지면을 할애해서 엮은 이 기사는 공군대위 성기수를 단번에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전국의 처녀들로부터 하버드대에서 2년 만에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한 31살의 청년장교와 결혼하고 싶다는 구혼편지가 그가 재직하고 있던 공군사관학교 교수부로 날아들었다. 다른 언론매체의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다. 언론들은 그를 두고 『이공학계의 미지수(未知數)』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장차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찬사였다.
「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각 분야에서 새 정부(3공화국)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부합하는, 유능하고 참신한 인물들을 한 명씩 골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신생 신문이었던 「한국일보」로서도 이 기획물에 거는 기대가 컸다. 성기수의 얘기가 「비전을 주는 인간자본(人間資本)」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은 시리즈의 두번째 인물로서였다.
첫번째는 당시 가장 잘 나가던 마흔네살의 물리학자이자, 원자력연구소 소장이던 최형섭(崔亨燮)이었다. 최형섭은 66년 2월 구(舊)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출범하면서 초대 소장에 올랐고 이어 71년 제2대 과기처 장관에 취임한 이후 역대 최장수 장관재임 기록(7년 6개월)을 갖고 있는 인물. 서른살의 일개 공군대위가 최형섭 다음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에 선정된 것은 성기수가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분야 오피니언 리더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얻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이 기사에서 성기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詩)를 애송(愛誦)하고 바흐에서 베토벤까지를 즐겨 듣는 예술파 청년 과학자로 묘사돼 처녀들로부터 당대 최고의 신랑감으로 부상했다. 주변에서 성기수의 혼담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에 앞서 성기수는 1년 전 유학시절 어쩌면 현지에서 결혼할 뻔했던 미모의 한 여성을 만난 적이 있었다. 지난 호(본지 4월 30일자 25면, 제13회)에서 설명했던 대로 성기수는 3, 1절 밤 보스턴에서 있었던 한인축제에서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간호사였던 박(朴)이라는 여성을 알게 됐다. 참석자들로부터 인기를 한 몸에 모았던 성기수는 축제가 끝나고 박의 병원 기숙사까지 차로 데려다 주며 애프터까지 받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몇달 후면 귀국해야 할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미국 영주를 원하고 있었다. 성기수는 자신이 서른의 꽉 찬 나이이긴 했지만 결혼상대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에 과감하게 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부인 엄정림(嚴玎林)과 결혼한 것은 그 해가 저물기 전인 64년 11월이었다. 덕수궁(德壽宮)에서 중매로 만난 지 꼭 두 달만이었다. 한일은행(韓一銀行)에 다니던 둘째 매형이 직장 상사의 딸을 처남댁으로 연결시킨 것이었다. 엄정림이 첫눈에 든 성기수는 다음날 전격적으로 약혼반지를 건넸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귀국 전 보스턴에서 사둔 것이었다.
첫 만남에 『바로 이 여자다』라는 느낌이 든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 이를테면 둘 사이에 결혼하지 않으면 안될 「인연」 때문이라고 믿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성기수는 둘째 매형이 정식 소개하기 전 이미 4년 전에 그녀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날은 성기수가 하버드대학원 유학을 떠나기 한 달 전인 60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이날 서울 신대방동(新大方洞) 공군사관학교 구내(현 보라매공원) 실내체육관에서는 공사 교수부의 총각 교관 50명이 이화여대 불문과 졸업반 여학생 50명 전원을 초대한 성탄절 전야제 파티가 성대하게 열렸다. 파티가 시작되기 전 수송책임을 맡은 성기수는 필동(筆洞) 공군버스 주차장에 모인 50명의 이대생들을 싣고 공사 체육관까지 가는 동안 곱게 차려 입은 한복의 현란한 색깔, 짙은 향수 체취, 처녀들의 재잘거림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엄정림도 이 50명의 한복 처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4년뒤 덕수궁에서 만나 알게 된 일이었다. 파티가 시작되고 제비뽑기를 해서 서로의 파트너가 정해졌다.
성기수는 여기서도 사회자에 의해 『한달 후면 하버드 대학원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떠날 전도유망한 청년장교로 소개됐다. 이런 상황에서 우쭐해지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공통점일 터였다. 그의 평생 반려자가 된 엄정림을 미리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엄정림은 매사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남들이 보기에 융통성 없는 고집쟁이 남편과 소리내며 부부싸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수십 년 공직 생활 동안 딱 한번 다녀온 가족의 여름휴가, 홍릉(洪陵)단지 KIST아파트 시절에 소프트웨어 개발로 밤샘을 낮근무로 일삼던 연구원들이 밑반찬이며 세간을 들어내도 그녀는 군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주부로서 공직자 남편에게 좀더 편하고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방식을 요구했을 법도 한데 그녀는 평생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 따랐다. 그런 엄정림에게도 성기수에 대한 불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기수의 자녀교육 스타일은 말 그대로 방목(放牧)형이었다. 2남1녀에 대해 성기수는 먹기 싫다고 떼쓰는 아이에게 억지로 먹이는 법이 없었고 하기 싫은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도록 해주고 하고 싶을 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나중에 후배와 제자들에게 외국유학과 장학금을 주선한 것 역시 환경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배려한 측면이었다. 그러나 엄정림은 아이들의 아빠로서, 그런 성기수의 방목형 교육 스타일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허약한 아이들 건강 때문에 남편 몰래 별식을 시키다가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성적이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아이들에게 숙제를 강요하다 남편과 부딪힌 적도 있었다.
경희대학교 부근, 복개되지 않은 실개천이 흐르던 서울 회기동(回基洞)에 셋방을 얻어 시작한 신혼살림은 궁핍하기가 그지 없었다. 유학시절 박사후과정 연구원 때 「국민주택」과 「새나라」자동차를 사려고 저축했던 돈은 사업하던 남동생이 진 빚을 갚고,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고향 성주(星州)에서 농사를 짓던 큰누님 밭뙈기 장만하는데 보태 주니 바닥이 났다, 공군대위 월급과 서울대 대학원 강사료로는 턱없이 부족한 살림살이였다.
급료가 높은 미국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으면 그래도 생활에 큰 보탬이 될 듯싶었다. 생각을 거듭한 나머지 하버드 대학원 은사였던 브라이슨(Bryson, Arthur)교수에게 편지를 냈다. 용산 주한 미8군사령부 영내에 개설돼 있던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서울분교 교수자리를 추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버드대 입학심사는 물론 초단기 박사학위 논문 통과심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브라이슨은 『하버드 박사의 월급이 겨우 40달러여서 되겠느냐』며 쾌히 메릴랜드대 서울분교 교수자리를 추천해 줬다.
그러나 성기수는 교수 발령을 받고도 단 한 시간의 강의조차 나가지 못했다. 메릴랜드 교칙에는 한 학기에 5명 이상 학생이 신청하는 과목에 대해서만 강좌를 개설할 수 있었는데 성기수의 전공인 열역학(熱力學), 수학(數學), 기계공학(機械工學) 등에 대해서는 끝내 강좌개설 요건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릴랜드분교는 대부분 주둔 미군이나 군속 자녀들이 다니던 곳이었는데 귀국 후 취직용 실용학문을 원했던 그들로서는 순수학문 분야인 성기수 강의가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브라이슨이 두번째로 추천해 준 곳이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립대 수학과 교수였다. 온타리오대 측은 즉시 성기수를 전임교수로 발령을 내고 입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왔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비행기표까지 동봉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61년 유학 때와 마찬가지로 현역군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이 문제가 됐다. 58년 공군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했던 성기수의 의무복무 기간은 원래 62년까지 만 4년이었다. 그러나 61년 당시, 현역군인 신분으로 유학을 떠나는 조건으로 의무복무 기간이 10년으로 연장돼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온타리오대에서 보낸 항공권은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성기수는 공군당국이 자신을 예편시켜 줄 수도 있었다며 아쉬워했지만 그렇다고 온타리오대에 가는 것이 크게 내킨 것도 아니었다. 당시 성기수는 송인상(宋仁相, 전 부흥부 장관, 현 한국능률협회그룹 회장)이 이끌던 한국경제개발협회(KDA)에서 파트타임 조사역으로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3공화국 초기 경제, 행정분야 연구소로서는 거의 유일했던 KDA는 성기수를 좀더 오랫동안 붙잡아 놓고 싶어했고 막 설립 작업을 끝낸 KIST의 초대 소장 최형섭도 그를 끌어올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다음주 목요일자에 계속>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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