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12)

제3부 케임브리지의 동양인-다시 쓴 하버드 300년사 (3)

고속카메라를 설계해 주는 대가로 여름방학 석 달 동안 1천5백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브라이슨(Bryson, Arthur)교수의 제의는 분명 놀라운 것이었다. 어쩌면 연구과제는 물론 의식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준비 없이 석 달 동안의 여름방학을 보낼 뻔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그처럼 높은 급료의 서머잡(Summer Job)이 다른 동료를 제쳐두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자신에까지 몫이 돌아오게 됐는지를 알게 된 것은 이틀 뒤였다. 고속카메라의 설계작업이 고차원의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연구과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낭패였다. 고속카메라는 고온고압 충격파에서 발생하는 백만 분의 몇 초 동안의 섬광을 필름에 담아야 하는, 이를테면 우주선이 극초음속으로 비행할 때나 천둥번개가 칠 때 고압기체와 저압기체 사이에서 생기는 충돌현상을 관찰하기 위한 특수 사진기였다.

한 달 동안을 도서관과 공작실을 오가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고속카메라의 시제품은 커녕, 설계도면 자체도 그려낼 수가 없었다. 카메라 설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남은 두 달 동안 필름 데이터를 판독해 보기로 했다. 필름에 잡힌 섬광 중 고압부분의 화학성분을 알아내는데 필요한 이론적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체면이나 세워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브라이슨 교수에게 갖다 보일 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입장이 난처해졌다. 어떤 비난을 들어도 할말이 없게 됐다. 자퇴할 각오도 했지만 브라이슨 교수를 찾아가서 전후사정을 얘기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브라이슨 교수도 성기수를 더 이상 호출하지 않았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가을학기 내내 브라이슨 교수를 피해 다녔다. 그런 브라이슨 교수를 이제 1년 안에 완성해야 하는 박사학위논문의 지도교수로 모셔야 할 판이었다. 외나무다리에서 원수와 마주쳤고 코너에 몰린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62년 2월 봄학기 자기유체역학(磁氣流體力學, MHD: Magnetohydrodynamics) 첫 강의시간이 돌아왔다. 강의실 맨뒤에 숨어 앉아 있을까 하다가 브라이슨 교수가 알아보고 나가라고 하면 즉시 나갈 수 있도록 맨 앞쪽 출입문 옆에 앉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브라이슨 교수는 금새 성기수를 알아보고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성기수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채 눈만 껌벅거리며 브라이슨 교수의 표정만 살피고 있는데 스스로 생각해 봐도 자비를 구하는 죄수의 그것처럼 자신이 비굴해 보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강의가 끝나고 브라이슨 교수는 예의 그 자상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강의실을 나갔다. 그뿐이었다. 브라이슨 교수는 성기수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고 새 출발하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날 성기수는 이번만은 절대로 그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MHD 과목에서 그의 자랑거리가 돼 줘야 한다라는 각오를 새겼다. 그런 다짐이 있은 후 성기수는 봄학기 4개 수강과목 가운데 절반 이상의 노력을 MHD 한 과목에 쏟아 부었다. 논문주제여서 그렇기도 했지만 브라이슨 교수에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마음이 더 앞섰다.

강의가 4주째로 접어든 어느 날, MHD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이 브라이슨 교수 방으로 몰려가 강의를 좀더 쉽게 해줄 것과 과제분량을 줄여달라고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브라이슨 교수가 정색을 하면서 성기수가 제출한 과제물들을 직접 보여주더니 『미스터 성(成)의 것이 완벽하니 자네들은 더욱 분발하든지 그에게 배우든지 하라』며 학생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해 버렸다. 동료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기수는 가슴속에 맺혀 있던 체증이 확 풀리는 듯했다. 이를테면 동양인으로서 열등감, 브라이슨 교수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들이었다.

브라이슨 교수는 강의 과제물 외에도 학생들에게 가끔씩 몇 가지 연구주제를 제시하고 희망자 중에서 한 명을 지명하여 도전해 볼 것을 권하곤 했다. 그러나 그즈음 각광받던 MHD발전기 등 인기가 높은 연구과제들은 동작 빠른 학생들의 차지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 브라이슨 교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성기수에게는 언제나 어렵거나 인기가 없는 과제만 돌아갔다. 학위논문에 대해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그해 4월 중순이었다.

부활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브라이슨 교수가 자신조차 해법을 얻어내지 못했다며 성기수에게 연구과제 하나를 맡겼다. 편미분방정식을 이용해서 우주선날개 주변의 MHD흐름을 해석하는 과제였다. 우주선 날개는 가장 전형적인 전도성(傳導性) 물체이다. 제대로만 한다면 지난 겨울 자신이 정한 박사학위논문 주제의 뼈대로 곧장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주일간의 부활절 휴가가 시작되자, 캠퍼스는 텅 비었다. 휴가 첫 날부터, 모든 지식과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브라이슨 교수가 던져준 연구과제에 몰두했다.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이 유일한 휴식이었다. 전장에서처럼 전진과 전율을 거듭하며, 때로는 지친 심신을 심호흡으로 재무장하며 달랜 끝에 닷새 만에 연구과제의 끝이 보였다.

브라이슨 교수에게 연구결과를 갖다 보였더니 『이만하면 학위논문의 기초로서 손색이 없네, 앞으로 잘 보완해 보게』 하며 크게 만족해 했다. 그 자리에서 성기수는 브라이슨 교수에게 국가재건최고회의 국방당국의 연내 귀국 명령에 대해서 설명하고 즉시 박사과정 예비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브라이슨 교수의 배려로 62년 5월 치른 2과목의 외국어와 박사과정 예비시험은 모두 합격이었다.

일이 술술 풀려간다 싶었는데 결정적인 사건이 될지도 모를 곤란한 일이 발생했다. 브라이슨 교수가 연가(年暇)를 받아 연말까지 서부에 있는 한 비행기제작회사에 가게 됐고 그 사이 성기수의 논문연구 지도교수가 C교수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더욱이 C교수의 관심분야는 MHD가 아니어서 성기수에게 제시한 연구과제들도 일반 유체역학 분야가 대부분이었다. 8월부터 남은 기간은 최종방어일인 63년 1월 28일까지 6개월, 그 사이에 C교수의 지도를 받아 새로운 논문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성기수는 C교수가 제시하는 연구주제는 하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부활절 브라이슨 교수의 연구과제 때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유선형물체 주변의 MHD흐름 해법」 완성에만 몰두했다. 연말에 브라이슨 교수가 돌아오면 최종 방어 한 달을 남겨놓고 논문지도 교수를 바꿀 심산이었다. 그렇게 되면 C교수와의 관계 악화는 필연적이겠지만 할 수 없었다.

62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서 브라이슨 교수가 학교에 돌아왔다. 그동안의 논문 연구진도를 보여줬더니 브라이슨 교수는 지도교수 변경을 쾌히 승낙해 줬다.

운명의 63년 1월 28일이 돌아 왔다. 예정된 귀국일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성기수는 브라이슨 교수, 전임지도교수였던 C교수, 그리고 당시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교환교수로 와 있던 J교수 등 3명의 심사위원 앞에서 학위논문 「유선형물체 주변의 MHD흐름 해법」에 대한 최종방어가 있었다. 3시간 동안 3명의 교수들로부터 질문과 공격을 받고 부연설명과 칠판에 수식(數式)을 전개해 가며 방어에 진땀을 뺐다. 지도교수를 바꿔버린 데 대해 불쾌한 감정의 발로였는지 C교수가 논문의 수식처리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은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심사위원 3명의 심의 끝에 성기수의 논문이 부결된 것이다.

망연자실하며 귀국 짐 보따리를 꾸미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연거푸 일어났다. 2년전 출국 비행기표를 내줬던 캘리포니아의 아세아재단(亞細亞財團)에서 귀국용 비행기표와 함께 박사후과정(博士後課程)을 위해 귀국을 6개월 늦출 수 있도록 한국정부의 허락을 얻어냈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비행기표를 요청하기는 했지만 귀국연기를 교섭해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일주일 동안 성기수는 문제가 된 수식부분을 다시 풀어쓴 부록을 첨가하고 원문은 수정하지 않은 채 다시 학위논문을 만들었다. 브라이슨 교수와 J교수에게 서명을 받은 뒤 마지막으로 C교수를 찾아갔다. 연구실 문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전화받는 목소리가 아주 쾌활하다고 느꼈을 때 들어가서 논문을 제출했다. 나오면서 성기수는 『고향의 어머니가 나의 성공 소식을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고 있으니 가능한 빨리 논문을 읽어줬으면 고맙겠다』는 말을 남겼다.

보름이 지났을까, 한국신문을 보러 들르곤 하던 하버드의 옌칭(燕京) 동양학도서관에서 그즈음의 「동아일보」에서 「공군중위 성기수 하버드에서 기록적 단기간에 기계공학박사학위 취득」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와 서울의 작은누님, 그리고 조카들이 C교수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는 사진도 곁들여 있었다. 그렇다면 C교수가 곧장 논문에 서명을 하고 서울에 편지를 낸 셈이었다.

드디어 해냈다. 석사와 박사학위를 2년 만에 모두 취득한 것은 하버드대학 3백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미국 유학 2년1개월 만이었다. 즉시 귀국해도 됐고 남은 5개월 동안을 박사후과정 연구원으로 마저 근무할 수도 있게 됐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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