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빠르게」라는 모토로 지난 수 십년 동안 진보만을 거듭했던 CPU가 숨을 고르고 있다. 보다 앞선 기술력, 인텔인사이드로 표명되는 브랜드파워, 그리고 강력한 마케팅력을 발판으로 그동안 CPU를 앞으로만 치닫게 했던 장본인인 인텔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움직임의 중심에 서있다. 인텔은 내달 「커빙턴」이라는 보급형 CPU를 발표할 예정이다. 커빙턴은 지난해 인텔이 선보였던 최신 마이크로프로세서인 펜티엄Ⅱ의 기본 아키텍처를 채용했으나 L2캐쉬, 기계적인 부품 등을 삭제하고 클록주파수도 현재 제품보다 낮춘 제품. 그 결과 기존 펜티엄Ⅱ에 비해 가격은 저렴하나 성능상으로는 뒤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텔역사상 최초의 후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곧이어 저가PC용 전용 칩세트, 메인보드 규격 등 토털 솔루션을 제공해 저가 PC시장을 겨냥한 무차별 공세에 나설 예정이다.
인텔의 이같은 일보후퇴는 지난해 하나의 시장군으로 자리잡은 저가 PC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1천달러 미만의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저가 PC는 일시적인 기현상이라는 업계 관계자들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난해 미국 전체 PC 판매량의 30%를 차지했다. 올 초에도 이같은 추세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최근에는 총판매 PC중 저가 PC의 비중이 40%를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저가 PC가 이제는 가장 큰 제품군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인텔은 「PC는 진보한다」라는 슬로건으로 고성능 CPU를 계속 선보이면서 고급 PC시장을 독점하고 10%에 못미치는 나머지 철지난 저급 PC시장은 AMD나 사이릭스에 양보하는 시장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지난해 저가 PC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이들 시장을 중점 공략한 AMD나 사이릭스 등 호환칩 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은 높아졌고 그 반대로 인텔의 시장점유율은 떨어졌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서 80% 이상을 항상 유지해 왔던 인텔의 시장점유율이 최근에는 75%대까지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인텔의 올 1, Mbps분기 매출액은 8년 6개월만에 전년동기 실적보다 밑돌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인텔의 앤드루 그로브 회장은 최근 PC 저가화는 인텔에 있어 「D램사업 철수」 「펜티엄 결함」 등에 필적할 만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에 따라 인텔의 시장전략도 모든 마켓세그먼트를 포용하는 수평적 마케팅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특히 커빙턴의 출시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 그동안 시장을 야금야금 잠식해온 호환칩 업체들과 일전을 치를 만반의 태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맞서 인텔 호환칩 업체들은 저가 PC뿐만 아니라 고급형 PC시장 진출을 위한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저가 PC시장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수익성이 높은 고가 PC용 CPU시장도 이제는 간과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AMD, 사이릭스 등 호환칩 업체들의 성공은 사실 지난해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특히 AMD는 지난해 인텔보다도 빨리 686급 CPU인 K6를 출시하면서 본격적인 시장경쟁을 예고했으며 사이릭스는 초염가 CPU인 미디어 GX를 발표, 저가 PC가 탄생할 수 있는 기폭제를 마련했다. 그동안 기술력에 비해 자본력과 마케팅력에서 열세를 보여왔던 사이릭스는 지난해 내셔널 세미컨덕터에 인수되면서 든든한 후견인을 만난 것도 도약의 한 계기.
삼파전으로 전개돼 왔던 PC용 CPU시장에 지난해 말 새롭게 도전장을 내민 업체는 IDT. IDT는 인텔에 비해 40%의 가격차를, 그리고 AMD와 사이릭스에 비해서는 10% 정도의 가격차를 둠으로써 후발업체의 핸디캡을 극복해 가고 있다.
이들 업체가 인텔이라는 거인에 맞서기 위해 올해는 가격경쟁력 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신기술 개발에 공동 노력하는 등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AMD, 사이릭스, IDT 3사는 기존의 MMX 기술에 비해 부동소숫점 연산성능을 보강하고 3D기능을 강화한 2세대 MMX 기술을 공동 개발중으로 올해 중반부터 이를 지원하는 제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AMD는 올해 2, Mbps분기 말 선보이는 3백㎒ K6-3D부터, 사이릭스는 올 하반기에 발표할 3백㎒대의 펜티엄Ⅱ급 CPU인 MXi에, IDT는 올 여름 내놓을 2백40/2백66㎒ 윈칩 C6에 2세대 MMX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다. 2세대 MMX 지원 CPU를 채용할 경우 PC에 별도의 그래픽카드를 설치할 필요가 없어 현재보다 더 낮은 7백~8백달러대 PC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또인텔 펜티엄의 플랫폼 방식인 소켓7을 계속 고수, 펜티엄으로부터 업그레이드를 용이하게 하는 방식으로 업그레이드 시장도 노리는 전략을 펼칠 예정이다. 현재 인텔의 펜티엄Ⅱ는 슬롯1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채용, 소켓7과의 호환성이 없으며 향후 발표할 슬롯2도 소켓7과는 호환성을 갖지 않는다. AMD나 사이릭스는 올해 연말까지 4백㎒ 제품까지 출시, 그동안 인텔이 독점해온 고급 PC시장에도 일정 지분을 유지한다는 계획이다.
인텔이 커빙턴을 고육지책으로 내놓긴 했지만 인텔은 역시 기술선도 업체다. 현재의 인텔을 지탱해 왔던 기술력, 생산력, 마케팅력 우위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호환칩 업체보다는 한발 앞선 제품을 먼저 출시해 시장을 독점,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기존 사업전략이 약화돼서는 안되며 올해도 그 부분은 공고히 지켜질 것이다. 인텔은 이달 열린 세빗전시회에서 이미 7백㎒ 펜티엄Ⅱ 시제품을 출시, 타업체보다는 한 차원 높은 기술력을 보여 줬다. 인텔은 지난해 펜티엄 MMX, 펜티엄프로, 펜티엄Ⅱ로 나눠졌던 제품군을 올해 펜티엄Ⅱ 아키텍처로 통일한다.
하이엔드 서버 및 워크스테이션용으로는 펜티엄Ⅱ 아키텍처에 4개의 멀티 CPU 장착이 가능하고 풀스피드 캐시가 채용된 슬롯2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상반기에 발표할 예정이다. 인텔이 올해 연말경 선보일 CPU의 클록주파수는 4백50㎒. 타업체보다는 최소 50에서 1백㎒ 이상이 차이날 것으로 보인다. 내년에는 드디어 인텔 최초의 64비트 CPU 머세드가 선보인다.
인텔이 지난 94년부터 HP와 공동개발에 나서고 있는 이 CPU는 기존 64비트 CPU 시장에 일대 파란을 불어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인텔은 이 칩으로 그동안 스파크, PA-RISC, 알파, 밉스, 파워칩 등으로 분점돼온 64비트 CPU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고 있다.
이같은 업체들의 제품출시 계획과 함께 시장판세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변수는 생산능력. 최근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호환칩 업체들은 주문은 늘고 있으나 한정된 생산능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CPU업체들이 모두 0.25미크론 공정으로 이전하면서 수율안정에 최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인텔 외에는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이유로 AMD, IDT 등이 올해 초 IBM과 CPU 용역생산 계약을 체결했으며 사이릭스는 CPU 생산량을 확대하기 위해 내셔널 세미컨덕터사에 생산라인을 구축중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시장경쟁은 이들이 시장에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해줄 수 있는 올해 말쯤에나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올해 중반 출시되는 윈도98이 과연 어떤 모습을 띨 것인지도 향후 CPU시장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예측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 CPU의 세대교체나 업그레이드는 윈도3.1, 윈도95, 인터넷 등 굵직굵직한 소프트웨어의 출시시기와 함께 했다. 사실 현재 CPU 성능은 소프트웨어 등 타분야 기술발전 추세를 앞질러 사용자들은 기존 CPU로도 대부분의 소프트웨어를 별 불편함 없이 소화할 수 있을 수준까지 향상됐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동안 출시시기를 계속 미뤄온 윈도98에 거는 CPU업체들의 기대는 남다르다.
「공동전선을 형성해 저가 PC의 돌풍을 이어가려는 호환칩 업체, 이에 맞서 사업전략을 수정하면서까지 맞불을 놓으려는 인텔.」 바야흐로 제대로된 경쟁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유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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