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보고된 사례다. 자폐증에 걸려 통 말이 없는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있었다. 파리의 의과대학에서 언어심리학을 강의하는 앨프리드 토머티스라는 교수가 이 아이의 치료를 맡았는데, 처음에는 아무리 말을 붙여봐도 통 반응이 없었지만 한 달 정도가 지나자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치료 과정에서 좀 이상한 사실이 드러났다. 불어가 아닌 영어로 말을 걸 때마다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친 적이 없었고 집에서는 영어를 거의 쓰지도 않았다. 게다가 집에서 들은 영어를 기억한 경우였다면 소녀의 오빠나 언니도 조금은 알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나중에 소녀의 어머니가 임신중에 무역회사에 근무하면서 거의 영어만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출생 전 심리학(Prenatal Psychology)」은 바로 이처럼 신비한 태아의 능력을 다각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다.
위의 사례를 뒷받침하는 예가 또 있다. 캐나다의 어느 교향악단 지휘자는 젊어서 처음 지휘봉을 잡았을 때 연주 도중 악보를 보지도 않았는데 문득 첼로의 선율이 떠올랐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첼리스트인 어머니가 그 곡을 늘 연주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의 얘기다.
어린이는 두세 살이 되기 전까지는 외부 자극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를 거의 할 수 없다는 것이 19세기까지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감정적, 정서적 고통이 육체에 물리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프로이드 학설의 전제는 그러한 견해에 반하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즉, 임산부의 감정 상태가 태아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0년대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의료 기술에 힘입어 이같은 가설은 실증적인 증거를 얻게 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태아는 1개월만 되어도 조건반사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흔히 신생아가 우는 것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배고프다」 「졸린다」 「춥다」 등등의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일종의 「보디 랭귀지」도 이미 2개월 정도된 태아때부터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발로 차거나 몸을 움츠리는 동작이 다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4개월이 되면 표정도 나타난다고 한다. 자극에 따라 미소를 짓거나 찡그리기도 하며 입에 자극이 오면 빨려는 모습도 보여준다.
5~6개월이 되면 촉각도 본격적으로 나타나 사실상 한 살된 아이와 비슷한 수준에 이른다. 게다가 미각도 느낄 수 있다. 태아가 들어있는 양수는 좀 짠맛이 나는데 여기에 당분 등 여러가지 첨가물을 타면 그때마다 양수를 마시는 선호도나 횟수가 달라진다고 한다.
6개월 이후의 태아는 청각에도 예민하다. 자궁은 사실 조용한 장소라고는 할 수 없다. 외부의 소리도 들려오지만 임산부의 내부 장기들이 내는 소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화 과정에서 위장이 꾸르륵거리는 소리도 나고 특히 심장이 뛰는 규칙적인 박동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이 심장 소리가 태아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신생아에게 녹음한 심장 고동소리를 계속 들려주었더니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훨씬 양호한 발육 상태를 보여주었다는 보고도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태아의 의식 형성은 7~8개월 즈음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이 시기부터 태아가 기억을 할 수 있고 보존도 한다는 의미다. 우리네 나이 세는 법이 서양과는 달리 태어나면서 한 살이 되는 것도 위에 언급한 사실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와야만 독립된 인격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2개월 즈음에 인간으로서의 모든 면모를 훌륭히 갖추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3개월 미만이면 낙태를 하곤 하는 세태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박상준, 과학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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