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4)

제2부 청년 성기수-부러진 왼쪽 날개 (1)

34세부터 59세까지 25년간을 오직 한 곳,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에서 보낸 것과는 달리 성기수의 10대 시절은 방황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지난 13일 경북 성주(星州)농공고등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이 학교 제69회 졸업식은 성기수가 10대 시절에 겪었던 고난의 일면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성기수는 이 졸업식에서 당시 6년제인 성주농업학교(당시 교명)를 47년 만에 수료했다는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이날 신문과 방송들은 65세의 대학총장이 47년 만에 고교졸업장을 받았다며 그를 화제의 인물로 부각시켰다. 명예졸업장 수여식 장면을 카메라에 담던 대구의 한 TV방송 기자는 성기수에 대해 『참으로 복이 많으신 분』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 3만명의 성주읍(星州邑)은 성공한 이 노(老)과학자의 금의환향(錦衣還鄕) 행사나 진배 없었던 이날 졸업식으로 읍내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성주농공고 교정에는 군(郡)내 유지들, 그리고 대구와 부산, 멀리 서울에 사는 동창들이 그의 졸업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속속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당시 성주농고 5학년이던 성기수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5명의 국회의원과 6명의 장관, 3명의 대학총장을 배출했다는 성주농고 개교 69년 사상 명예졸업장을 받은 이는 이날의 성기수가 처음이었다. 별도로 마련된 답사에서 성기수는 졸업식에 함께 참석한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이날이 있기까지를 회고했다.

『졸업장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 만한 시절에 뼈저리게 느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학업을 중단한 뒤 집에서 소년 가장이 돼 농사를 짓다가 53년 대학시험을 치려는데 고교 졸업장이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몇 년 동안 학업을 중단한지라 성주농고 학적부에는 내가 5학년에서 무단 결석 3년째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궁리 끝에 50년 전쟁발발 직후 행방불명된 작은형의 김천중학교(현 金泉高等學校) 졸업증명서에 내 사진을 붙인 입학원서를 만들었지요.』

50년 성기수가 성주농고 5학년을 중퇴하기까지 그의 10대 청소년시절은 해방, 좌우익(左右翼) 사상논쟁,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의 질곡(桎梏)이 함께 하던 시기였다. 전쟁 전까지 고향인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대장동(大獐洞) 일대에서 부농(富農)으로 꼽히던 성기수의 집안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는 인민군 부역자(附逆者)의 누명을 쓰고 국군과 경찰에 의해 처형됐고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학중이던 작은형은 의용군으로 참전해 행방불명이 된 상황이었다. 서울에 살던 큰 매형 역시 좌익으로 몰려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조상 대대로 물림해 왔던 온갖 재산은 몰수됐으며 안채와 사랑채, 헛간 등 3채의 건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의 고향집은 헐값에 팔려나갔다.

큰형과 두 누나가 출가한 상황에서 성기수는 학업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중2년생인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떠맡아야만 했다.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였다. 성기수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당시 그가 이른바 「보도연맹(輔導聯盟)」의 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고향 대장동 마을에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이 들어왔을 때 그는 보도연맹의 회원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다니던 성주농고 운동장으로 끌려가 같은 반 학우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다. 여하튼 학교는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보도연맹이란 해방 직후 전국을 휩쓸던 좌우익 사상논쟁 과정에서 좌익성향을 보인 인사들을 정부에서 감시 통제하기 위해 만든 기구를 말하는 것. 당시 당국에 의해 좌익으로 분류된 학생, 지식인들은 강제적으로 이 보도연맹 회원에 가입돼 관찰보호를 받아야 했다.

성기수가 보도연맹 회원자격(?)을 획득한 것은 열다섯 살 되던 해인 48년 여름. 그가 다니던 대구사범대학 부속중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고등학교)를 제적당한 직후였다. 대구사대부중은 당시 지방 최고명문 중학교(5년제) 가운데 하나였다. 고향인 성주 인근의 칠곡군(漆谷郡) 누관면(樓面, 지금의 倭邑) 왜관국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던 성기수는 특차로 이 학교에 입학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성기수가 고향마을인 대장동의 초전국민학교를 두고 40리 밖의 왜관국민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45년 해방 때 그는 초전국민학교 5학년에 적을 두고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초전국민학교에는 일본인 교사들이 한목에 떠나게 됐는데 그 자리를 자격과 신원이 검증되지 않은 한국인 교사들이 메꾸게 됐다. 이후 학교 주변에서는 인근 처녀들과 한국인 교사들 사이에 품행문제가 자주 거론됐고 이를 계기로 한 학부모 모임에 참석했던 아버지가 불만을 품은 담임교사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성기수는 5학년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왜관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왜관국민학교 전학은 결과적으로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10대 시절의 방황이 비로소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 됐던 셈이었다.

대구사대부중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는 2학년과 3학년생이 함께 치른 교내 수학경시대회에서 3위에 입상하는 수재였으며 축구부, 문학부, 과학공작부 등 서클활동에도 열성적인 모범학생이었다. 그가 좌익사상에 경도되기 시작한 것은 2학년에 진급하고 축구부 활동에 열성을 보이면서부터였다.

48년 정부 수립을 전후한 3년간은 한국의 학생운동사 측면에서도 좌우 대립기로 특징지을 수 있는 시기다. 이 시기 학생운동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국 어느 학교에서나 공부를 잘하던 수재들이 적잖게 좌익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좌익계열 학생운동의 모토는 반외세(反外勢) 민족주의와 반독재(反獨裁) 민주주의였다.

성기수가 재학 중이던 대구사대부중에서도 「해방군처럼 거리를 활보하는 미군(美軍)에 대한 적개심」과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설득력을 갖고 학생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업국가에서 러시아혁명을 거쳐 단기간에 공업국가로 변신한 소련(蘇聯)식 사회주의 국가모델이 빠른 속도로 학생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대구시내 학원가에서도 자본주의 맹점이나 지주계급들의 악덕사례를 고발하고 무정부 상태를 선도하는 유인물들이 수시로 살포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형적인 농촌 출신이자 수재였던 성기수가 좌익에 경도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대구사대부중의 좌익학생운동은 우수 학생이 대거 가입해 있던 축구부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다. 2학년이 된 어느 날 성기수는 『광복된 이 땅에 이상국가를 세워야 하는데 친일 앞잡이들이 미국의 세(勢)를 얻고 득세하여 애국지사들을 박해함으로써 국토가 양분되려 하고 있다. 너희들은 불이 난 집 속에서 공부만 하고 있을 텐가, 불끄는 일에 나설 텐가.』라며 일장연설을 하는 축구부 선배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이 대목에서 그는 과감하게 책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48년에 접어들면서 전국은 해방 이후 최대 혼란기를 맞고 있었다. 2월 7일 전평(全平,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산하 30만 명의 노동자들이 「단선, 단정(單獨選擧, 單獨政府)」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벌였고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각급 학교의 동맹휴학이 시작됐다. 학생들은 대대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동맹휴학시위의 대오(隊伍)는 대학생들보다 중학생들이 훨씬 길었다.

가두시위에서 체격이 왜소하며 동안(童顔)이던 성기수는 전위(前衛) 행동대원으로서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진압경찰 또는 단선, 단정을 지지하는 우익학생들과 마주쳤을 때도 그는 왜소한 체격 덕택으로 여러 번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전평의 총파업으로 시작된 이른바 「2.7구국선언」의 여파는 5월 1일 「메이데이사건」에 이어 7월 19일 여운형(呂運亨) 1주기 추도식 참가 및 시위학생 검거선풍으로 좌익학생운동이 사실상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됐다. 성기수는 이 과정에서 메이데이 사건 때 한 번, 그리고 여운형 추도식 시위학생 검거선풍 때 한 번 등 모두 두 번 체포됐다. 첫번째 체포는 훈방으로 끝났다. 그러나 두 번째 체포는 법원에 송치되면서 벌금형과 함께 대구사대부중 제적이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그가 보도연맹 회원에 가입한 것은 6개월간의 좌익활동 청산을 서약하고 보호자인 아버지에게 인계되던 48년 8월이었다. 당시 대구부중 축구부원으로서 성기수와 함께 제적당했던 학생 가운데는 김민하(金玟河, 전 중앙대 총장, 현 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와 권상능(權相能, 현 전국화랑협회 회장) 등도 끼어 있었다.

아버지에 이끌려 고향 성주에 내려온 성기수는 그 해 가을과 겨울을 나는 6개월 동안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보냈다.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한동안 그는 「나름대로의 애국심」과 「혁명의지」에 불타 있었다. 「아차」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 해 늦가을이었다. 전국학생과학전에 입상한 대구사대부중 동기생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이어서 미국신문 「헤럴드 트리뷴」이 주최하는 영어 컨테스트에 동기생이 입상해 미국 유학의 길이 트였다는 기사도 실려 나왔다. 자존심 강한 성기수의 충격은 컸다.

그는 스스로 반문했다. 『나의 섣부른 정치활동이 장래를 망쳐 놓는 것은 아닐까, 영영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국민학교 시절부터 유학에 대한 꿈을 키워오던 터였다. 더욱이 과학전에 입상한 성재경(成在慶, 현 大韓油槽船 사장)이나 유학을 가게된 이시영(李始榮, 在美사업가)이 모두 영어와 수학점수에서 자신보다 뒤져 있지 않았던가.

시름에 잠겨 있던 어느 날 성기수는 집 앞의 초전면 사무소 벽보판에 나붙은 성주농고 4년(지금의 고1) 편입생 모집광고를 보았다. 48년 12월 각급 학교직제 가운데 5년제 농업학교가 6년제로 승격되면서 월반 등으로 학급원 수가 크게 줄었는데 성주농고의 편입생 모집은 이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기수의 중단된 학업은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인 성주농고에서 다시 시작됐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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