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3)

제1부 인생의 새출발-새로운 희망 (3)

동명문화재단 산하 동명산업대학교(동명정보대학교 설립 이전 명칭) 설립추진본부장 강정남(姜正男)이 성기수를 찾아 세번째로 대덕단지를 방문한 것은 95년 6월 말이었다. 성기수로서는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정중한 예를 받은 셈이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강정남을 향해 성기수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한달 전 기분전환 겸 부산을 찾아 동명산업대학교 신축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온 이후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면서 정리해뒀던 몇 가지 얘기를 꺼냈다. 이를테면 인터뷰를 시작한 셈이었다.

『교육기자재와 시설을 전국 최고 수준으로 도입할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박사님의 계획을 전적으로 믿고 투자하겠습니다.』

『유능한 교원 확보와 우수학생 선발 재량권을 총장에게 맡길 수 있소?』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주객이 서로 전도된 인터뷰는 그렇게 간단히 끝이 났다.

성기수가 제시한 교육기자재와 시설은 곧 슈퍼컴퓨터센터와 같은 대규모 컴퓨터교육 장비와 환경을 의미했다. 이 가운데 슈퍼컴퓨터는 성기수가 대학교육현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교육기자재 목록 1호였다. 88년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시절 미국 크레이리서치사로부터 한국 최초의 슈퍼컴퓨터를 도입해 국내에 비로소 슈퍼컴퓨터 시대를 연 그였다. 슈퍼컴퓨터를 대학의 교육기자재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세미나와 언론기고를 통해 누차 강조해온, 한국 최고의 컴퓨터과학자로서 성기수의 평생 지론이었다.

인사 재량권을 거론한 것은 재단이 대학을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비민주적으로 운영할 때 야기되는 사학(私學)문제를 차단함으로써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받고 싶다는 의사표시였다. 이 두 가지는 과학자에서 교육자로 변신하려는 새로운 희망이자, 그동안 정직하고 근면하고 소신있게 살아온 그의 인생철학이었다. 희망과 철학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지켜지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미련없이 떠나야 한다는 자신과의 다짐이기도 했다.

강정남이 부산으로 돌아간 날 밤 성기수는 벅차오르는 새로운 희망으로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28년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자계산실장으로 첫 출근하던 당시의 느낌이 그랬을까 싶었다.

그렇게 뒤척이면서 성기수는 한 사람의 지인(知人)을 떠올렸다. 그가 SERI 소장을 물러났던 92년 한국기계연구원 원장을 사퇴했던 김훈철(金燻喆)이었다. 며칠 전 어디서 소식을 들었던지 김훈철은 전화를 걸어와 대뜸 『부산(동명산업대학교)으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으이』라고 한 말을 그는 기억해냈다. 성기수는 평소 『세계적인 대학과 연구소 육성』에 뜻이 있음을 내비쳤는데 김훈철의 이 말은 그에 대한 화답이었던 셈이었다. 대덕단지에서 김훈철과의 교류는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던 성기수에게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기계연구소 원장을 사임하고 연구위원으로 물러나 있던 김훈철은 역시 연구위원의 입장에 있던 성기수에게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출연연구소라는 울타리는 이제 더 이상 과학자로서 신념을 펼 수 있게 해 주는 곳이 못된다며 기회가 있으면 SERI를 벗어나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존경하는 학자로서, 지인으로서 서로 돈독한 신뢰감이 싹튼 것은 92년 김훈철의 원장직 사퇴를 몰고온 경부고속철도 기종도입 반대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91년은 온나라가 경부고속철도 기종 선정과 그 배경을 놓고 논란을 벌이던 때였다. 또한 청와대 경제수석 김종인(金鐘仁)이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과학기술처 산하 출연연구소의 성과와 역할 정밀검토(본지 2월 12일자 참조)가 한창이던 때이기도 했다. 성기수와 김훈철의 만남을 더욱 운명적이게 한 것은 두 사람이 이 정밀검토 대상에서 요주의 기관장 1, 2호였고 결국은 그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각각 소장직을 사퇴했다는 점이다. 성기수 입장에서 보면 김훈철의 사퇴과정에는 자신도 한몫 단단하게 거들었던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한국기계연구원은 당시 고속철도사업기획단(92년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으로 재출범)에 다수의 연구원들이 파견돼 있었던 데다 「경부고속철도 차량형식(기종) 선정」과정에서 중요한 기술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때 기획단은 프랑스의 테제베(TGV), 독일의 이체에(ICE), 일본의 신칸센(新幹線) 등 이들 가운데서 한 기종을 선정하기로 중간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이 파리, 크레송 총리가 서울을 각각 방문하는 틈을 타 정부가 이미 고속철 기종을 테제베로 내정해 놓고 프랑스 측으로부터 6천억∼8천억원의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설이 무성했고 이런 추측들은 일간신문 사설에까지 등장했을 만큼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기계공학박사 출신들인 성기수와 김훈철의 당시 대화도 자연스럽게 고속철 도입에 관한 내용으로 모아졌다. 두 사람은 서울대 조선항공과 2년 선후배 사이이자, KIST의 입소시기도 거의 비슷한 동년배여서 여러 면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는 배경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미시간대학원에서 운동중인 유체(流體)나 기체(氣體)의 내부마찰 즉 점성저항(粘性抵抗)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던 김훈철은 물론이거니와 하버드대학원에서 자기유체역학(磁氣流體力學)을 전공한 성기수 역시 고속철에 관한한 최고 권위의 전문가들이었다.

일부 부품의 수입과 약간명의 감리기술자를 외국에서 불러들인다면 국내 기술로도 시속 2백50㎞의 고속철을 당장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이 두 사람 대화의 핵심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또한 한국업체가 기종 공급의 주계약자가 됨으로써 25억~29억달러나 되는 도입비 대부분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기수와 김훈철은 자신들의 주장이 과학자로서의 신념일 뿐 아니라 진정한 애국의 방법이라는 데 의심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리라던 88서울올림픽 전산화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성기수로서는 고속철 제작을 처음부터 외국업체에 맡기겠다는 정부발상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같은 주장은 92년부터 김훈철에 의해 정부측에 지속적으로 건의됐다. 그러나 김훈철의 건의는 경제기획원의 관료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의해 번번이 묵살됐다. 이번에는 성기수가 나섰다.

92년 여름 성기수는 황낙주(黃珞周) 국회 부의장을 통해 김영삼(金泳三) 민자당 대표와 노태우 대통령에게 비슷한 내용의 건의문을 전달했다. 황낙주는 이 건의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측으로부터의 정치자금수수설에 대해 계파보스인 김영삼 대표가 노태우 대통령을 공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표 앞에서 직접 설명할 기회를 마련하겠다던 황낙주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김훈철은 출연연구 기관장 자격으로 정부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기계연구원 원장에서 해임됐다. 성기수는 이에 앞서 대전엑스포93 전산화에 관련된 투서사건으로 연구위원으로 물러나 있었던 터라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성기수가 부산행을 결심하기까지는 김훈철과 가까이 지냈던 지난 3년여 동안의 시간들이 큰 도움이 돼 줬다.

김훈철과의 의기투합과 교감에 의해 더욱 굳어진 새로운 연구소 및 대학의 육성에 대한 방향과 의지는 당시 성기수가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국가의 기술개발력 향상을 위해선 연구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대학과 연구소의 운영은 대학인과 연구인에게 자율적으로 맡겨야 한다. 다시 말해 대학과 연구소에 대한 각종 통제가 중단돼야 하는 것이다. 대학과 연구소 운영에 대해 교수와 연구원 스스로가 결정하고 집행하도록 하고 그 집행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전자저널 92년 2월호)

성기수가 동명문화재단 산하 동명산업대학교 예비 총장으로 첫 출근한 것은 95년 9월부터였다. 그리고 성기수가 그 해 12월 동명문화재단이 그토록 시도했건만 들어주지 않았던 교육부의 대학인가를 장관과의 단독면담으로 받아냈다. 96년 3월 개교를 전후해서 성기수는 TV출연과 신문 인터뷰, 광고모델을 마다하지 않았다.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기 위해 IBM과 직접 협상하고 T1∼T3급 회선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와 한국통신 관계자를 수시로 접촉했다.

그러나 이런 작업들은 한국의 MIT 건설을 염두에 둔 신설대학 동명정보대학교 총장 성기수에게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가 잠못이루며 쏟아부었던 노력과 열정은 개교 첫해 신입생 모집이 15대1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더욱 가슴 벅찬 일은 동명대학교가 개교 원년에 한 중앙 언론기관이 전국 1백50여개 학교를 대상으로 실시한 대학평가에서 40대 우수대학으로 뽑혔다는 사실이었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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