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2)

제1부 인생의 새출발-SERI를 떠나다 (2)

동명산업대학교 설립추진본부장 강정남이 돌아간 후 성기수의 머릿속에는 지난 3년여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92년 1월 시스템공학연구소(SERI) 소장직을 사임하고 연구위원으로 물러나 앉게 된 일, 93년 3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이던 김은영(金殷泳)의 부탁으로 KIST부설 연구개발정보센터(KORDIC) 소장을 맡게 된 일….

그때 김은영은 성기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아직도 할 일이 많아!』

당시는 그 말이 그저 위로의 말 정도로만 들렸었다.

67년부터 92년까지 25년 동안 재직했던 SERI에서의 세월. 30대의 열정과 40대의 자신감, 50대의 지혜를 모두 바쳐 오로지 한길만을 걸어왔던 25년이었다. 3년의 시간은 그런 25년의 세월을 무력감이라는 단어 하나로 얼버무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는 따위의 값싼 감정이 아니었다. SERI 소장을 사퇴한 것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3년 동안은 바로 이 괴리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곰곰이 되짚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성기수가 과학기술처로부터 드러내놓고 사퇴압력을 받기 시작한 것은 6공화국 후반기인 91년 가을부터였다. 이때는 고속성장을 구가하던 한국경제가 88서울올림픽을 치른 이후 소비의 증가로 무역적자폭이 커지던 상황이었다. 흑자폭이 1백억 달러에 이르렀던 88년이 불과 3년 전이었다. 경제연구소들은 92년의 무역수지가 3년 전과는 반대로 1백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연일 각급 기관장들이 참석하는 대책회의가 열렸고 무역적자의 원인과 확대폭을 줄이는 방안 등이 논의됐다. 91년 가을 어느날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과기처의 장, 차관과 출연연구소장급 기관장들이 참석한 한 회의에서 경제수석비서관 김종인(金鍾仁)에게 『출연연구소의 역할과 성과를 정밀평가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날 회의는 김종인이 기획한 것이었다.

김종인은 출연연구소들의 기술개발성과가 미흡했기 때문에 국산 수출품이 외국산과 기술경쟁에서 밀려 무역역조가 심화되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다. 대통령의 지시는 바로 그런 배경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즈음 유력 종합지인 D일보 경제면에는 출연연구소 기관장(소장)들의 연간 판공비가 11억원에 이른다는 요지의 과기처 고위층 인용기사가 실려 대덕단지가 발칵 뒤집혔다. 나중에 D일보측은 이 기사의 편파성을 시인하고 사과의 뜻을 전해왔지만 청와대의 과학기술계에 대한 시각교정에는 이르지 못했다.

대통령의 지시가 있은 뒤 과기처는 출연연구소의 기능 재정립과 운영효율화 방안이라는 것을 해당기관에 내려보냈다. SERI에 내려보낸 것은 연구인력의 정리해고였다. 과기처에서 볼 때 SERI는 필요없는 연구인력이 가장 많아 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성기수는 오히려 연구인력 정리를 대전엑스포가 끝나는 93년 이후로 연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고락을 함께한 연구원들을 내 손으로 치느니 내가 옷을 벗겠다고 버텼던 것이다.

출연연구소 운영효율화 방안으로 불거진 과기처와 SERI와의 불협화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92년 1월 초 대전엑스포93 전산시스템 「모아드림」의 개발과정에서 등장한 투서사건은 과기처와 SERI의 불협화음을 극에 달하게 하는 촉매역할을 하고 말았다.

「모아드림」은 91년 9월 대전엑스포조직위원회와의 정식계약에 의해 SERI가 국내 소프트웨어업계와 공동개발을 추진해 오던 것으로 88년 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에 버금가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SERI가 「모아드림」프로젝트 추진 전담기관이 되기까지는 조직위원장인 오명(吳明)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컸다. 오명은 기본적으로 성기수에 대해 상당한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 체신부 차관(81∼87년) 재직시절 오명은 SERI가 당시로서는 국내기술로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88올림픽 전산시스템 GIONS를 성공리에 개발한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감동을 받았던 터였다.

대전엑스포93이 폐막된 직후인 93년 늦가을 오명은 한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대전엑스포93은 1년 앞서 열린 스페인의 세비아엑스포92에 비해 예산은 10% 적게 쓰면서 규모와 운영능력은 10% 이상 앞서야 한다는 것이 기본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산시스템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지요. 그런데 전산시스템 개발은 신뢰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외국회사에 맡기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GIONS를 개발해낸 성기수 소장을 밀어부쳤습니다. 그 분이라면 적은 예산으로도 프로젝트를 충분히 수행해 낼 수 있다고 믿었지요.』

「모아드림」 개발에 대한 성기수의 계획은 부문별 시스템에 전문성을 가진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신문공고를 통해 발굴, 활용함으로써 효율적인 프로젝트 진행과 함께 소프트웨어시장의 수요창출을 유도한다는 방침이었다. 조직위측에도 양해를 구했다.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를 통헤 1백20개 희망업체 가운데 선정된 곳이 (주)포스콘, 타프시스템, 한국정보진흥(주), 포톤연구소, CGI테크놀로지, (주)차림, (주)솔빛조선미디어, (주)신한전산, (주)영화시스템, 세양전산(주) 등 15개사와 KIST 인공지능연구센터였다.

바로 이때 과기처, 상공부 등에 민간기업이 맡아야 할 엑스포 전산화 수탁사업을 출연기관인 SERI가 맡는 것은 불공정한 행위라는 내용의 투서 한 통이 전달돼 왔다.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명의로 된 이 투서는 그러나 사실은 당시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회장사였던 S사와 또 다른 S사 등 재벌기업 계열의 시스템통합(SI)업체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과기처가 즉각 SERI에 각종 수탁사업에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나섰다. 그러나 성기수는 「모아드림」이 대전엑스포 조직위로부터 88서울올림픽 전산화시스템 개발성공의 업적을 평가받고 정식으로 발주받은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투서가 발단이 돼 계약을 파기할 수는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과기처의 경고나 지시가 민간업계의 대변인 역할에 그치고 있다고 맞받았다.

마침내 4대 SI회사 대표들이 김종인을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대기업들이 해야 할 사업을 SERI가 맡게 됐다는 강한 불만을 직접 토로한 셈이었다.

김종인의 판단을 굳혀준 것은 SI회사 대표들을 옆에서 거들었던 당시 과기처의 S차관이었다. S차관이 SI회사측을 두둔하고 나선 것은 성기수와의 매끄럽지 못했던 관계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90년 12월 공사(公社) 부사장에서 영전된 이후 S차관은 성기수와 과기처가 여러 번 충돌하는 것을 보아왔다. 한 번은 장관이 성기수에게 서울에 남아 있던 SERI강남분소를 대덕단지로 완전 이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성기수는 그러나 「모아드림」프로젝트가 대부분 서울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는 만큼 대전엑스포가 폐막되는 93년 이후로 이전을 늦춰줄 것을 주장했다. 이 충돌은 「모아드림」프로젝트의 중요성이 당국에 의해 받아들여져 일단은 성기수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그런 식이었다.

4사 대표와 김종인의 만남이 있었던 다음날 S차관은 당시 KIST 원장이던 박원희(朴源熺)를 과천청사로 불러들여 『SERI가 이래도 되느냐』라며 성기수를 직접 겨냥한 발언을 했다. 박원희는 폭언에 가까웠던 이날 S차관의 발언내용을 여과없이 그대로 성기수에게 전했고 성기수는 그날짜로 미련없이 사표를 썼다. 그날 성기수는 박원희의 표정을 통해 과기처가 이미 자신의 사임 그 자체를 겨냥해왔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성기수의 임기중 사퇴는 결과적으로 출연연구소의 정밀검토에 의한 연구소장 사정 1호가 된 셈이었다.

과기처의 성기수에 대한 사표수리는 당시 과기처를 출입하던 기자들에 눈에 다음과 같이 비쳐졌다.

『…그의 평소 신조와 철학에 비추어 감독관청인 과기처와의 불협화음때문에 사표를 제출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중략)…양측의 마찰은 (SERI의) 연구인력 정리문제…엑스포전산화 등 수탁사업에 개입…(중략)…그러나 이같은 이유들은 표면적일 뿐…(중략)…과기처의 성 소장에 대한 해묵은 감정이 개입됐을 것…(중략)…성 소장의 대쪽같은 성품과 직언, 「고지식한 과학자」가 권위와 지시일변도의 생리에 굳어진 관에 밉보이는 것은 당연….』(92년 1월 29일자 중앙경제신문)

성기수의 사퇴파동이 있자 대전엑스포 조직위원회 주변에서는 「모아드림」의 개발일정에 상당한 차질이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아드림」은 조직위와 계약한 날짜인 93년 8월 7일 대전엑스프93 개막일에 맞춰 정확하게 가동됐고 그해 11월 7일 폐막때까지 3개월 동안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운영됐다.

15개 업체들도 단 한 곳의 교체 없이 모두 SERI측과 용역계약을 맺고 끝까지 맡은 프로젝트를 수행해냈다. 물론 프로젝트 추진중 몇 가지 변화가 있긴 했다. 우선 성기수 후임으로 부임한 신동필(申東弼)이 역시 과기처와의 불화로 SERI 소장직을 7개월만에 도중하차했다. 외부적으로는 성기수와 대립했던 과기처의 S차관, KIST 원장 박원희, 경제수석 김종인 등이 그해 6월 이전 모두 현직에서 물러났고 장관 역시 이듬해 2월 문민정부 등장과 함께 옷을 벗었다.

성기수가 SERI 소장을 사퇴하자 S, K그룹 등 적지 않은 기업들이 고문영입 의사를 타진해 왔다. 성기수는 그러나 대기업들의 기술고문은 대부분의 과학기술계 원로들이 그렇게 했듯 사회활동의 마지막 자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애당초 뜻이 없었다.

강정남이 그를 동명산업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영입하기 위해 대덕을 방문했던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강정남의 제의가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SERI에서 28년간 역정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했다. 이런 시간은 강정남이 한달여의 틈을 두고 그를 찾아 세번째 대덕을 방문할 때까지 계속됐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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