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인생의 새출발-손님이 찾아오다 (1)
부산 동명문화학원 산하의 동명산업대학교 설립추진본부 본부장 강정남(姜正男)이 대전 대덕단지 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부설 연구개발정보센터(KORDIC)의 성기수 소장실을 찾은 것은 95년 3월초 어느 날이었다. 1층 안내 데스크에서 방문증을 받고 소장실로 향하는 계단에 오르면서 강정남은 그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하면서도 긴장감이 앞섰다.
강정남의 이날 대덕행은 성기수에게 자신들에 의해 동명산업대학교(동명산업대학교 설립추진본부는 95년 12월 교육부의 설립인가와 함께 현재의 교명인 동명정보대학교로 바뀜)의 초대 총장 후보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정식으로 알리고 그의 확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강정남이 긴장한 것은 성기수를 천거한 이들의 조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기수에 대해 한결같이 『초대 총장감으로 더할 나위 없는 인물이지만 확답을 얻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인물평과 조언을 잊지 않았다. 성기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추천자들의 평과 이력서를 조회해 본 것 외에는 별다른 게 없었던 그로서는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더욱이 그가 대덕에 오기 일주일 전 찾아뵙고 싶다는 전화를 넣었을 때 성기수로부터 『찾아온다는 사람을 막을 수야 없지』라는 식의 다소 퉁명스런 뉘앙스를 받았던 터였다.
강정남의 대덕행이 있기까지, 즉 성기수가 자신과 무관하게 동명산업대학교 총장 후보가 된 과정을 알아보려면 60∼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명문화학원의 설립자 고 강석진(姜錫鎭)은 60∼70년대 10대 재벌군을 오르내리던 동명그룹의 창업자이며 최고경영자다. 그룹 모기업인 동명목재의 합판수출은 단일품목으로는 한국 최대규모였던 1억 달러를 돌파, 국내외의 화제가 됐었다.
조동성(趙東成)의 「한국재벌연구」를 보면 동명그룹은 1925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재상의 목공이던 16살의 강석진이 설립한 동명제재소에서 출발하고 있다. 부산진의 한 구멍가게에 불과했던 동명제재소는 강석진의 남다른 근면성과 독특한 기업경영을 바탕으로 49년 굴지의 합판제조전문사인 동명목재상사로 발전했다. 61년부터 시작된 합판 수출이 크게 성공, 69년부터 71년까지 3년 연속 한국 최고 수출상을 받았고 69년에는 강석진의 개인납세실적이 전국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75년경 동명목재상사의 합판공장 규모는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최대였고 종업원만 6천명에 이르렀다. 강석진이 62년부터 76년까지 15년 동안 3년간만 제외하고 계속 부산상공회의소 회장과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한 것은 당시 동명목재의 기업규모를 가늠케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강석진에게 평생 이루지 못한 꿈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배움에 대한 염원이었다. 정규 학력으로는 초등학교(청도공립보통학교) 졸업장만을 가졌던 강석진이 육영사업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어찌보면 매우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77년 당시 68세의 강석진은 더 늦기 전에 동명목재의 잉여금을 토대로 학교법인 동명문화학원을 설립하고 이듬해 동원공고(현 동명정보공고)와 79년 동원공업전문학교(현 동명전문대)를 잇따라 개교시켰다. 궁극적으로는 4년제 산업대학을 설립해 고급기술인력을 배출해내겠다는 것이 육영사업에 대한 그의 목표였다.
기업과 육영사업을 병행코자 했던 강석진의 꿈은 그러나 80년 국보위에 의해 동명그룹이 해체되면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이에 앞서 동명그룹은 기업경영의 젖줄이었던 합판 수출이 77년 1억 달러를 정점으로 하락세를 보인 데다 국제 원목가격의 폭등과 79년 제2차 오일쇼크 등으로 공장가동률이 30%대로 떨어지고 있었다. 부채에 시달리던 강석진은 결국 국보위의 강요로 전재산을 국가에 헌납해 부채를 청산하고 경영권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썼고 동명그룹은 창업 55년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
이 충격으로 와병한 강석진은 84년 75세로 타계했는데 다행히도 그의 육영사업은 동명문화학원과 부인 고고화(高古花)가 설립한 고화장학회를 통해 명맥을 잇고 있다.
강석진과 고고화 사이에는 법률상으로 1남2녀가 있었는데 성기수의 총장 영입을 주선한 강정남은 그 1남인 인물이다. 강정남은 95년 당시 동명문화학원의 실무경영자인 상임이사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선친의 유지를 이어받기 위해 90년도부터 본격적인 4년제 대학 설립을 위한 작업에 나섰다. 마침내 93년 12월 동명문화학원 산하에 동명산업대학교 설립본부가 발족됐고 그는 이 조직의 본부장을 맡았다.
총장 영입은 강정남이 해결해야 할 임무 1호였다. 설립본부에서는 인근 포항공과대학교나 한동대학교의 경우에서 보듯 지방의 신설 대학이 지명도를 얻고 자리를 굳히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초대 총장의 얼굴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강정남 자신도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는 학교 경영능력보다는 관계와 학계 그리고 산업계에 두루 지명도를 갖고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강정남이 이를 염두에 두고 후보영입 교섭을 벌인 대상은 성기수를 제외하고 모두 세 명이었다. 처음 찾아간 이는 지금은 고인이 된 이창석(李昌錫)이었다. 평양 출신인 이창석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52년 고시행정과를 통해 관직에 들어온 뒤 문교부, 공보처, 법제처, 교통부 등을 거쳐 71년부터 79년까지 9년 동안 제2대 과기처 차관을 역임한 정통관료 출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전신으로 영문명칭도 KIST로 같음) 부소장, 경제과학심의위원회 과학분과위원장, 원자력연구소 상임고문 등 과학계 요직을 경험한 바도 있었다.
이창석은 개인적으로 강정남의 장인이기도 했다. 이창석은 강정남에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성기수를 천거했다. 학계에 명망이 높은 데다 관계, 산업계에도 발이 넓다는 것이 천거의 요지였다. KIST 부소장 시절 이창석은 KSIT전자계산실 실장이던 성기수를 지근거리에서 보아왔고 과기처 차관 시절에도 여러 번 대면한 적이 있었다. 이창석은 끝으로 강정남에 새 총장감으로서 성기수가 사적인 이해득실에 집착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과, 그런 점에서 성기수를 영입하는 것이 만만찮은 일이 될 것임을 아울러 조언했다.
강정남이 두번째로 찾아간 이는 과학기술계 원로 최형섭(崔亨燮)이었다. 최형섭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의 합의에 의해 66년 발족된 KIST 초대 소장을 지냈다. 그가 71년까지 5년간 재임하는 동안 KIST는 국내 유일의 종합연구기관으로서 과학기술입국의 전진기지의 기틀이 다져졌다. 이같은 공로로 최형섭은 과학기술입국을 주창하던 박 대통령의 눈에 들어 71년 곧바로 제2대 과기처 장관에 올랐고 78년 12월까지 7년 6개월 동안 재임함으로써 역대 최장수 장관 재임기록을 세웠다. 원자력 전문가인 최형섭은 장관 재임기간중인 76년 박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던 「화학처리 대체사업」, 즉 원자폭탄 보유계획의 실무 지휘자로도 알려져 있다. 최형섭이 KIST 소장과 과기처 장관 재임시절 부소장과 차관으로서 그를 보좌하던 이가 바로 이창석이다. 이창석은 70년 KIST 부소장으로 최형섭과 인연을 맺은 뒤 최형섭의 입각 때 함께 과기처 차관으로 발탁돼 79년 초까지 고위관료로서 임기를 함께 했다.
강정남은 우선 최형섭에게 총장을 권유해 보고 안되면 새로운 인물을 추천받을 요량이었다. 최형섭은 자신이 고령(당시 76세)이며 더 이상 공직에 나서지 않겠다는 이유를 들어 일단 총장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런 다음 그는 이창석과 마찬가지로 성기수를 총장 적임자로 추천했다. 하지만 성기수에 대한 평가와 신뢰도는 오히려 이창석보다 훨씬 강했다.
1920년생인 최형섭과 34년생인 성기수의 만남은 KIST전자계산실이 창설되는 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중에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최형섭은 당시 한국 최초의 전산실이나 다름없었던 KIST전계실의 창설작업과 운영을 맡을 전산실장을 성기수에 맡겼던 것이다. 최형섭이 성기수를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은 서현진(徐鉉鎭)의 「처음 쓰는 한국컴퓨터사」 28, 29쪽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그(성기수)의 KIST 영입은 초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정렬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KSIT 소장이던 최형섭은 컴퓨터에 대한 전문지식 이외에 첫째 수학적인 두뇌를 가졌고 둘째 미국 등 선진국에서 실전적 경험을 쌓은 사람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 상태에서 김정렬로부터 공군대위 성기수를 추천받았다.』
성기수 입장에서 보면 최형섭은 한 번은 그를 추천받았고 또 한 번은 추천을 해준 셈이었다.
강정남이 총장영입을 위해 찾아간 이는 포항공과대학교 총장 장수영(張水榮)이었다. 우연이었을까. 장수영은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은 없다면서도 처음부터 대뜸 성기수를 추천했다. 포항공과대 전임 총장 고 김호길(金浩吉) 등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의 명성과 성품은 동명문화학원의 육영사업과 잘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귀띔도 잊지 않았다.
이창석, 최형섭, 장수영 등 과학기술계에서 내로라하는 명성을 가진 세 사람이 마치 사전에 입이라도 맞춘 듯 성기수를 천거하자,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했던 강정남의 대덕행 결심은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KORDIC 소장실에 들어서면서 강정남은 작고 단아한 체구에 눈빛이 소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반백 초로의 성기수를 처음 보았다. 첫 대면에 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다는 정도의 인사말을 기대했던 강정남은 그러나 내내 말을 아끼고 있는 성기수의 표정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정남은 최대한의 수사와 예법을 갖췄지만 성기수는 끝내 듣기만 했다. 궁금했음직한 대목에서도 되묻는 일이 없었다. 1시간 가량의 약속된 시간이 다 지나서야 성기수는 『잘 들었다』고 한마디를 했을 뿐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식의 뒷말은 없었다. 강정남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일어서야만 했다.
<서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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