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 장롱

『죽은 어머니 곁에서 나는 꼬박 하루를 보냈다. 만 하루가 지나자 장롱 깊이 숨겨진 어머니의 낡은 공책에 이름 석자와 전화번호만 뎅그마니 적혀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가 김이정은 단편소설 「도둑게」에서 장롱의 의미를 이렇게 묘사했다. 어머니는 집나간 아버지의 주소를 공책에 적어 장롱 깊숙이 간직했다.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는 딸에게 아버지의 주소를 남기고 부녀지정을 나눌 것을 소망한다. 장롱은 모든 죄악을 용서하는 애틋한 마음이 숨겨진 곳이며 헤어졌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고리였다.

장롱은 전통혼례에서 자못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주를 나타내는 사성(四星)과 택일을 적은 연길(涓吉)을 붓글씨로 딱종이에 각각 기록한 다음 이 두 종이를 장롱 밑에 고이 간직하도록 했다. 죽게 되면 함께 땅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이고, 또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은 후까지도 따뜻한 부부애를 고이 간직하자는 의미에서다.

자그마하게 만든 장이라는 뜻으로 장과 농을 통틀어 일컬었던 장롱(欌籠)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배어 있는 혼수용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장롱의 의미가 요즘 변질되고 있다.

최근 환율이 급격히 떨어지자 강남의 한 큰손은 장롱 속에 숨겼던 수백만 달러의 거금을 환전했다고 한다. 달러당 8백원에 사서 1천6백원대에 팔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수십억원을 번 셈이다. 이 졸부는 나라경제야 어떻게 되든 환율이 2천원 3천원이 되어 장롱 속 달러가 두 배, 세 배 오르기만을 고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집 장롱은 음흉한 탐욕의 온상이었다.

요즘 전국적으로 금모으기 운동이 한창이다. 돌, 백일 반지, 선물로 받은 복돼지 등등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내다 맡기고 있다. 이것들을 모아 금괴로 만들어 수출하면 최고 3백억달러까지 된다니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나와줘야 할 장롱 속 금괴는 꿈쩍도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에서 출처를 묻지 않고 실명을 따지지도 않는다고 했으나 도무지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들 대부분이 보통 한 돈에 5만원 정도에 구입한 것들이니 금의 경우는 오히려 값이 내려간 상태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장롱 속 금괴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큰 변란이라도 나서 돈이 휴지조각이 되고 금붙이만이 통하는 그런 시대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집 장롱은 저만 살겠다는 이기심의 묘상이었다.

언제까지 달러니 금괴니 그런 탐욕으로만 장롱을 채울 것인가. 이제는 소중한 향기가 있고 따뜻한 정이 배어 있고 애틋함이 스며 있는 사랑의 기억들로만 장롱을 가득 메워야겠다. 우리의 소중한 전통가구인 장롱이 지닌 본래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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