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가 2년 앞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두해를 더 보내면 1백년을 넘어서 또 다른 1천년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지금과는 또 다른 사회와 문화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물론 지금 섣불리 다가올 세기의 사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어설픈 공상이나 상상이 될 수 있겠지만 미래에 대한 예측을 시도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 지표를 설정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일이 될 것이다. 정보시대라 일컫는 지금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모습을 묘사하기가 어렵다기보다 그러한 사회가 얼마나 빨리 올 것인가를 예측하기가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2000년 어느날 한 가족의 일상을 통해 정보사회의 생활상을 미리 점검해본다.
<편집자>
<멀티미디어 학습>
학교에서 돌아온 하늘이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책상앞 벽에 걸린 50인치 대형 화면이 빛을 발하자 화면 속에서는 사이버 애완견 꼬꼬가 제일 먼저 하늘이를 반긴다. 작년 생일날 아빠에게서 선물 받았을 때는 보송보송한 솜털투성이의 작고 귀여운 강아지였는데 이제 커다란 어미개로 커버렸다.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 소리가 어느새 의젓하기까지 하다. 이제 하늘이가 하는 말을 거의 다 알아듣는다. 음성인식 시스템을 내장하고 있는 꼬꼬는 컴퓨터를 켜고 끄는 것은 물론 웬만한 명령어는 대부분 하늘이 대신 처리해준다.
『꼬꼬야, 샛별초등학교.』
컴퓨터는 하늘이가 다니는 샛별초등학교 중앙시스템에 연결되고 리모컨 키보드로 비밀번호를 누르자 낯익은 학교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오늘 과학시간에 배운 태양계의 모습이 너무 신기롭고 재미있었던 하늘이는 학교에서는 못 가본 토성에 가보고 싶었다.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토성은 둥근 띠를 두르고 있어 그 모습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과학, 우주, 태양계를 차례로 선택하고 학습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지구를 비롯해 수성, 금성 등 9개의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입체화면이 떠올랐다. 리모컨으로 토성을 눌렀다. 그러자 둥근 띠를 두른 토성의 모습이 확대돼 나오고 토성에 대한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이 음성으로 흘러나온다.
『토성은 태양계의 6번째 행성으로 크기는 목성 다음으로 두번째랍니다∥.』
한참 설명을 듣던 하늘이는 갑자기 숙제 생각이 났다. 태양계를 공부하고 나서 선생님이 내준 숙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낮과 밤이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오는 것.
하늘이는 학교의 전자도서관에 접속해 들어가 과학도서 목록을 찾아보고 그중에 지구에 대한 책을 선택했다. 그리고 「낮과 밤」 항목을 찾아서 지구에는 자전과 공전이 있고 그 때문에 낮과 밤, 4계절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늘이는 능숙한 솜씨로 문서작성기를 이용해 숙제를 끝마쳤다. 그리고 다시 꼬꼬를 불렀다.
『꼬꼬야, 전자우편.』
전자우편 시스템을 불러 숙제한 내용을 학교에 전송하고 하늘이는 한참을 기지개를 폈다. 오늘은 재미있는 공부를 해서 그랬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가 간 것 같다. 컴퓨터를 끄기 전에 혹시 전자우편이 들어온 것이 없는지 궁금해진 하늘이는 다시 꼬꼬를 부른다.
『꼬꼬야, 편지통.』
꼬리를 흔들며 사라졌던 꼬꼬. 잠시후 입에 봉투 하나를 물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하늘아, 오늘 과학시간에 배운 내용 재미있었니. 하늘이는 과학을 좋아하니까 분명히 재미있었을 거야. 숙제는 잊지 말고 꼭 해야 한다. 낮과 밤이 왜 생기는지 알고 나면 이 우주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알게 될 거란다. 하늘이에게 선생님이.』
선생님이 보내신 편지였다.
『치! 선생님은 잔소리가 너무 많으시단 말야. 배는 남산만 해가지고.』
하늘이는 괜히 심통을 부려본다.
『꼬꼬, 안녕.』
컴퓨터 화면이 꺼지고 하늘이는 어제 먹다 남긴 케이크 생각에 부엌으로 달려갔다.
<재택근무>
하늘이 아버지는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얼마전 전자백화점에 구축한 쇼핑몰 시스템이 자꾸 다운되기 때문이다. 시스템 구축에 팀장으로 참여했던 하늘이 아버지는 이번 일 때문에 이달 들어서 벌써 5일이나 회사엘 직접 나가야 했다.
재택근무가 일상화해 있어 보통 회사에는 일주일에 두번 정도 출근하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하늘이 아버지같은 개발자들은 한달에 한번 정도 회사에 나가는 정도면 그만이었다. 물론 프로젝트 초기단계에는 필요한 만큼 직접 모임을 갖기도 하지만 그것도 회사와 집에 연결된 네트워크망을 이용해 영상회의로 끝내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달들어 5번이나 직접 출근을 하고 있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하늘이 아버지는 이번 프로젝트의 팀장이었는데 한달이 넘도록 기본적인 원인규명조차 못하고 있어 이만저만 답답한 노릇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새롭게 시도해본 레고블록 시스템이 마음에 걸렸다. 레고블록 시스템이란 개발자는 시스템의 기획만을 맡고 실제 시스템 구축은 기성품으로 나와 있는 기능별 조각프로그램들을 기획에 맞게 조립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미 세계적인 대기업들도 성공리에 구축해 사용하고 있어 별 위험부담을 못 느꼈는데 이런 일이 벌어져 고민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레고블록 시스템을 회사에 적극 추천한 당사자였던 터라 하늘이 아버지는 더욱 난감했다.
이미 수천, 수만종의 블록들이 시중에 나와 있고 그중에 공인된 시스템들만을 썼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인터넷으로 전문가들과도 상담을 해보기도 했지만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비싼 시스템 검색사를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참에 영상통신 호출음이 들려왔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레고블록 선정에 함께 참여했던 시스템기획부 조 대리였다.
『팀장님, 원인을 찾았습니다.』
화면속 조 대리는 흥분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흥분되기는 하늘이 아버지가 더했다.
『47번째 레고블록 시스템의 전자상거래 보안키가 구 버전이었습니다.』
조 대리는 검색시스템 전문가답게 이번 일의 해결을 위해 에이전트 로봇을 총 가동했다. 이번 시스템 다운현상을 지능형 검색소프트웨어인 에이전트 로봇에 상세히 입력해 인터넷에 실어 보냈던 것이다. 결국 에이전트 로봇 하나가 인도의 한 프로그래머의 홈페이지에서 이번 일과 비슷한 사례를 찾아왔다. 화면속 조 대리의 웃는 모습을 보며 하늘이 아버지는 담배를꺼내 불을 붙였다.
<홈쇼핑>
『당신, 요즘 담배를 너무 피워요.』
하늘이 엄마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요즘 하늘이 아버지 회사일을 잘 알고 있는 터라 하늘이 엄마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매서운 맛은 없었다.
『지난번 검사결과 벌써 잊지는 않았죠?』
하늘이 엄마는 며칠전 하늘이 아버지가 병원에서 십이지장 궤양이 상당히 진척됐다는 판정을 받았음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하늘이 엄마는 그때 일을 다시 떠 올렸다. 평소부터 속이 좋지 않았던 하늘이 아버지는 최근 회사일로 신경을 많이 쓰면서 밤잠을 설칠 정도로 통증이 심해져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았다. 검사후 하늘이 아버지가 회사일로 출장을 가 있어서 검사결과는 하늘이 엄마가 받아봐야 했다.
검사결과가 몹시 궁금했던 하늘이 엄마는 매일 병원시스템에 접속해 검사결과를 확인했다. 3일째 되는 날 하늘이 엄마가 병원시스템에 접속해 검사번호를 입력하고 기다리자 결과가 나왔다는 메시지가 나왔고, 천연색 사진과 함께 십이지장 궤양이라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오늘에서야 문제가 풀렸어요. 기분 좋은데 우리 오늘 하늘이 데리고 외식이나 할까요?』
모처럼 만에 하늘이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보게 된 하늘이 엄마도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외식보다는 문제해결 기념으로 제가 특별 요리를 준비하죠.』
음식을 조심해야 하는 하늘이 아버지를 생각해 외식을 삼가려는 하늘이 엄마의 속깊은 생각이었다. 하늘이 엄마는 재빨리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동네 음식백화점의 홈쇼핑 코너에 접속했다. 오늘 들어온 생선 종류를 하나씩 찾아보다가 큼지막한 도미 한 마리를 선택한 하늘이 엄마는 계속해서 채소와 양념 종류를 꼼꼼히 골라본 후, 내친 김에 포도주도 한병 주문했다. 집 주소를 입력하고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해 대금지급을 하고 나서 부엌으로 향하던 하늘이 엄마는 방에서 나오던 하늘이와 마주쳤다.
『하늘아, 아빠가 오늘 회사일이 잘 풀리셨던다. 그래서 엄마가 특별요리를 준비하려고 하는데 하늘이가 좀 도와줄래?』
『네, 그런데 특별한 날에는 케이크가 있어야 하잖아요, 엄마.』
하늘이는 엄마가 말릴 새도 없이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떠올리며 다시 방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꼬꼬야, 홈쇼핑.』
<다국어 채팅>
『오빠, 저녁 먹자.』
하늘이가 별이의 방에 들어갔을 때 별이는 자기 또래의 여학생과 영상채팅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음식 만든다고 온 집안에 냄새가 가득한데도 한번 나와보지 않길래 채팅하고 있을 줄 알았다니까. 엄마한테 이를 거야.』
하늘이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별이는 대화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면, 1시간 후에 다시 만납시다.』
『알겠습니다. 그때는 내가 먼저 연락을 하겠습니다.』
하늘이가 다가가니 대화가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별이는 요즘 온라인 통역시스템을 제공하는 인터넷 다국어 채팅사이트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별이가 방금 대화를 끝낸 상대는 일본의 여고생이었다.
음성인식기술과 번역시스템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세계 어느나라 사람들과도 온라인 대화가 가능해졌다. 물론 일본이나 미국, 영국 등을 제외하면 아직 실시간 처리가 안되고 있지만 몇번의 다중 번역단계를 거치면 프랑스나 독일, 그밖에 다른 나라 사람과도 더디긴 하지만 온라인 대화가 가능했다. 특히 한일 통역시스템은 거의 완벽해서 미국과 프랑스의 네티즌간의 채팅과 함께 가장 빈번하게 이뤄지는 국제채팅이었다.
이런 통역시스템은 음성인식기술과 번역소프트웨어가 만나면서 가능해졌다. 우선 우리말로 얘기를 하면 한국어 음성인식 소프트웨어가 이 말을 문장으로 만들어 한일번역 시스템에 전달한다. 그러면 한일번역 시스템이 이 문장을 일본어 문장으로 번역하고 이것을 일본어 문자음성 변환시스템(TTS)이 일본어로 읽어줌으로써 통역이 이뤄진다. 물론 일본어로 얘기하면 그 반대의 단계를 거쳐 우리말로 번역돼 나오게 된다. 통역시스템은 개인과 개인간의 인터넷폰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아직은 통역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사이트의 방대한 시스템에 비할 바가 못된다.
『아까 그 여학생은 누구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하늘이가 물었다.
『굉장히 예쁘지. 도쿄에 사는 교포학생인데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알게 됐지. 그런데 그 여학생을 만나면서 알게 됐는데 통역시스템이 나쁜 것도 있다.』
『글쎄, 외국사람하고 우리말로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뭐가 나쁘다는 거지?』
하늘이가 의아해했다.
『우리말을 배우고 싶어하는데 내가 우리말로 얘기를 하면 모조리 일본어로 통역을 해버리니까 그 여학생은 우리말을 들을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 그것보다도∥.』
별이가 뭔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말을 멈추자 하늘이는 더욱 궁금해졌다.
『그 여학생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단 말야. 목소리는 더 예쁠텐데 말이야.』
<사이버 공동체>
오랜만에 하늘이네 가족이 한데 모여 저녁을 같이하고 있다. 고민거리가 해결되서인지 하늘이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유쾌해 보인다.
『이렇게 다들 한자리에 모여본 지가 얼마 만이냐. 다들 사이버 공동체에 빠져서 현실속에 우리를 잊고 지냈던 것 같구나. 우리 모두 현실의 공동체를 돌보는데도 애를 써야 하지 않겠니. 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별이에게 하늘이 아버지가 눈길을 돌렸다.
『아니에요, 아버지. 가족이 소중하다는 건 저도 잘 알아요. 잠시 아테네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아이구, 또 사이버 공동체 얘기구나. 이제 사이버 공동체도 엄연히 현실이 된 것 같구나.』
별이는 아차 싶었다.
사이버 공동체는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가상의 사회구성체다. 5, 6년 전만 해도 동호회라 부르곤 했는데 특정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인 동호회가 점점 확대되면서 그 안에서 또 특정분야의 모임이 생기고 또 그 안에 더 작은 모임이 생기고 하는 식으로 분화되면서 처음에 동호회가 하나의 사회조직처럼 커져버린 것이다.
각각의 사이버공동체는 대체로 입법, 사법, 행정 조직을 갖추고 있으며 구성원들간에는 고유의 신분증명을 부여해 공동체 의식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완벽한 직접민주주의 형태로 운영되며 가입과 탈퇴도 자유로워 구속적이기보다는 자율적인 의식공동체의 의미가 강하다. 이러한 사이버 공동체가 현재 전세계적으로 수백만개에 달하고 있다.
별이가 속한 아테네는 5년전 인문과학을 연구하는 동호회에서 시작된 사이버 공동체로, 구성원이 9만명 정도의 중소규모 공동체였다.
별이는 오늘 아테네에서 실시하는 긴급 비상대책회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테네 안의 바이러스연구소를 폐지할 것인가에 대한 전구성원 투표를 논의하는 회의다. 최근 인터넷에서 확산되고 있는 메일폭탄 바이러스의 원산지로 아테네 바이러스연구소가 지목을 받으면서 네티즌들에게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연구소 연구원이기도 한 별이는 난감했다. 사이버공동체 내에서 아테네 바이러스연구소가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전 바이러스연구소 소속의 한 연구원이 미국 국방성을 해킹하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비난의 강도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에이, 그 자식은 하필 이런 때 사고를 쳐가지고∥.』
별이는 혼잣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김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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