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국내 전자업계의 초미의 관심을 모았던 수입선다변화 조치의 조기폐지 문제가 오는 99년 6월로 최종확정되면서 국내 전자업계는 올 한해가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 힘든 한 해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비록 전면폐지 시기가 99년 6월로 당초 일정보다 6개월 앞당겨졌지만 이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서는 품목별로는 1년 정도 앞당겨질 수밖에 없어 당장 올해부터 무차별적으로 밀고들어올 일본산 제품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수입선다변화 제도는 만성적인 일본과의 무역역조를 개선하고 국산화 촉진을 통한 대외경쟁력 강화를 위해 지난 78년부터 시행돼오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에 비해 경쟁력이 없는 국산제품들은 이 제도로 인해 시장을 보호받으면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 반면 일본은 불공정무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이 제도를 거론하고 해마다 이의 철폐를 요구해왔다.
그렇지만 95년 WTO체제가 출범, 시장개방이 자유화하면서 우리 정부는 단계별로 적용대상 품목을 축소하고 오는 99년 말까지는 수입선다변화 조치를 완전히 철폐키로 했다. 이에 따라 주관부처인 통산부는 당초 계획처럼 1월에 25개 품목을 해제한 데 이어 매년 2번씩 99년 말까지 4차례에 걸쳐 점차 축소하고 2000년 1월 1일자로 완전히 폐지하겠다는 것을 공식화해왔다.
그러나 이번 우리 정부가 이같은 당초 계획을 철회하고 IMF의 요구대로 6개월을 앞당기는 것으로 결론을 냄으로써 기존 우리정부의 단계별 축소계획은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게 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수입선다변화 품목으로 묶여있던 1백13개 품목 중 이미 올 1월부터 25개 품목을 적용대상에서 제외한 데 이어 내년 6월에는 40개, 12월 32개, 99년 6월 나머지 16개 품목을 제외함으로써 수입선다변화 제도 자체를 완전 폐지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당장 1월부터 풀리는 제품을 제외한 나머지 88개 품목은 일단 업계나 관계당국 모두 국산제품이 일산제품에 비해 경쟁력이 뒤지고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같은 품목들이 갑자기 6개월 이상 앞당겨 풀리게 됨에 따라 국내시장 및 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수입선다변화 조치가 조기에 완전히 폐지될 경우 가장 타격이 우려되고 있는 분야는 소비자들의 일본산 제품에 대해 선호도가 유달리 높은 가전제품을 꼽을 수 있다. TV, 캠코더, VCR 등 AV제품과 중견 전문업체들이 생산하고 있는 전기밥솥 등 소형가전제품 등이다. 올 상반기 미국에서 생산된 소니TV가 대량 수입돼 국내 TV시장을 흔들어 놓았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해주는 좋은 사례다. 소니TV는 96년초부터 25인치 이상 컬러TV를 미국에서 생산해 국내 시장에 들여오기 시작해 단숨에 국내 전체 시장의 12% 정도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던 것.
따라서 우회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서 직접 국내 시장에 진입한다면 내수시장의 잠식정도는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실판매의 최일선을 담당하고 있는 각 유통점이 자신들의 유통력을 키우기 위해 앞다퉈 이들 일산 제품을 취급할 것으로 예상돼 현재 불법으로 유입돼 판매되고 있는 대형 일본산 TV의 시장점유율은 단기간 내에 20∼30%를 상회할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 LG전자, 대우전자 등 가전3사가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아이템은 1월 1일부터 수입선다변화 품목에서 해제된 디지털다기능디스크(DVD)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DVD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일본산 제품이 대거 유입될 경우 국내 DVD 관련산업은 태동하기조차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다. 국내 DVD시장이 활성화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로 10개 이내에 불과한 소프트웨어의 부족문제가 꼽히고 있지만 일본의 경우 이미 수백개의 소프트웨어가 나와 DVD산업의 확대를 부추기고 있다. 결국 일본 DVD 소프트웨어가 대거 유입되고 이를 보기 위해 국내 소비자들이 일본산 DVD 플레이어를 구입, 초기시장을 이들 일산제품이 장악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 대형제품 외에도 가전업계는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일본의 조시루시나 마루가나, 타이거 등의 전기밥솥 등이 대거 유입된다면 국산제품의 입지를 크게 위축시킬 것이다.
이같은 가정용 제품 외에도 일반 산업설비에 들어가는 각종 산업용기기도 수입선다변화 조치가 조기에 폐지될 경우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일본산 공작기계는 수입선다변화 품목으로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요자의 선호도가 높아 우회수출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체 공작기계 수입액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수입선다변화 제도가 해제될 경우 대일 공작기계 수입폭증은 물론 첨단기술 이전이 거의 불가능하고 범용기술도 로열티 인상이 불가피해 국내 업체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기계공업진흥회는 이같은 업계의 현실을 직시해 최근 「수입선다변화 제도 해제에 따른 대책」 건의서를 통해 일본업체들의 덤핑수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조정관세제도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기계제작용 수입부품에 대한 관세를 인하 또는 폐지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는 한편 기술력 확보를 위해 동종업체간 부당 스카우트 방지대책을 마련할 것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업계 스스로도 WTO체제 하에서 수입선다변화 제도의 조기폐지를 기정사실화하고 업계 공동의 정보교류망을 설치하는 한편 기종별 이익률 등을 분석, 수익성이 떨어지거나 성장 가능성이 적은 품목은 제품개선이나 생산라인을 축소하고 있다.
또 비주력 제품에 대해서는 국내업체간 또는 일본업체들과 상호 OEM 공급을 하거나 판매제휴 등도 적극 추진해할 방침이다. 결국 기계업계에서도 근본적으로 핵심기술을 자체 보유는 물론 일본제품에 비해 가격 및 품질 면에서 경쟁력을 갖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라고 인식하고 기술개발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처럼 수입선다변화 조치의 조기폐지는 전자 및 기계산업 전반에 큰 타격을 가져올 것으로 우려되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수입선다변화 조기폐지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지 정부 및 관련업계의 체계적인 대응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IMF경제라는 큰 흐름 속에서 수입선다변화 조치의 조기해제 문제는 극히 사소한 것 아니냐는 잘못된 시각으로 명분은 물론 실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심각한 우려의 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김일수 이사(업무담당)는 『일본의 경우 수입선다변화 제도와 같은 정부 차원의 산업보호조치는 마련돼 있지 않지만 민간기구 차원의 각종 규제장치가 마련돼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있다』며 『수입선다변화 조기폐지 문제가 금융기관 통폐합 등 IMF의 강도 높은 조치에 묻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대로 정부가 수용할 것이 가장 우려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수입선다변화 제도라는 온실 속에서 성장해온 국내 전기, 전자, 기계산업이 어차피 시장개방이라는 세계적인 조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갖출 수밖에 없으며 일본산제품에 비해 경쟁력이 현격히 뒤떨어지는 품목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과감한 정리도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양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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