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자산업이 경기침체와 국제경쟁력 약화로 본격적인 구조조정기에 접어들면서 인프라스트럭처(하부구조)에 대한 각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세트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부품산업의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데 이어 핵심(core) 소재산업과 관련 제조장비산업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부품제조장비산업은 전자산업의 핵심 기간산업으로 간주되고 있는 많은 일반 전자부품의 경쟁력강화의 필수적인 요소인 만큼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즉, 부품산업의 인프라스트럭처마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품산업의 질적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최근 국내 부품업체들의 현실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관련 제조장비의 자급이 없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부품업체의 설비투자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이 경쟁국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장비산업의 속성 탓이다. 실제로 부품업체들은 핵심장비들을 경쟁국으로부터 대부분 수입, 사업내용과 추진단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때문에 국내 업체들이 장비를 발주하는 단계에서 경쟁국은 이미 양산에 나서는 선수를 치게 마련이다.
이같은 명분 외에도 장비산업은 자체적으로 시장전망이 매우 밝으며 경우에 따라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한 유망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건비상승과 제조업체의 구인난이 심화될 수록 자연히 부품업체들의 자동화와 시설투자가 지속적으로 추진돼 장비시장은 계속 커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장비산업은 또 일반 산업용 기계와 범용 부품 조립장비와 달리 주문제작형 산업으로서 부가가치가 매우 높다. 사정은 약간 다르지만 이미 일부 반도체장비업체들의 성공사례가 이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관련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도 적지않다. 우선 장비산업이 견실하면 전방산업인 전자부품은 물론이고 조립-세트 등 전자산업 전반에 연쇄적인 경쟁력회복이 혜택으로 돌아간다. 또한 장비시장이 확대되면 여기에 채용되는 관련 부품시장도 확대되는 특징이 있다.
부품 제조장비산업은 이처럼 전자산업 전반의 질적성장에 근간이 되는 중요한 산업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전자산업의 발달단계가 세트-부품-소재로 내려오며 다소 기형적으로 성장, 장비산업의 기초와 저변이 상당히 약한 편이다. 물론 「메모리신화」로 대변되는 반도체 장비산업은 전방산업의 측면지원에 힘입어 이젠 어느 정도 자립기반을 갖춰가는 모습이지만 일반 부품은 대부분 장비산업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더구나 일반 부품도 날이 갈수록 표면실장부품(SMD)화되고 관련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자동화 붐을 타고 산업자체가 장치산업화하면서 고가장비의 수입비중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우선 일반부품을 대표하는 PCB의 경우만 해도 웨트장비, 노광기, 라미네이팅기, 스크린인쇄기 등 비교적 범용장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된다.
PCB는 보통 주요 공정만도 20가지가 넘는데 CNC드릴, 핫레스, 도금, 검사장비 등 고가의 핵심장비는 물론 범용장비의 상당부분도 일본, 미국, 유럽, 대만산이다.
PCB산업이 고부가 MLB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면서 이같은 장비수입 의존도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최근엔 특히 BGA기판 등 초박판PCB의 잇따른 출현과 IVH(Interstitial Via Hole)기판, 빌드업PCB 등 차세대 PCB프로세스의 등장으로 이미 국산화된 범용 장비시장마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영화OTS, (주)SMC, 백두기업, 미농상사 등 일부 PCB장비업체들은 자체 개발한 최신장비를 외국에 수출하는가 하면 개발분야를 첨단 PCB장비로 전환하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활발한 활약을 보여줘 국내 PCB장비산업에 한가닥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대표적인 회로부품인 저항기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세라믹로드에 탄소나 금속피막을 입히는 착막기를 비롯, 캡소팅기, 커팅기, 웰딩기, 도장기 등 주요 장비들이 주로 대만에서 수입되고 있다. 국내업체라야 고작 착막기와 도장기를 일부 주문생산하고 있는 이화정공뿐이다.
콘덴서의 경우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알루미늄 화성공정과 함침공정이 핵심인 전해콘덴서의 경우는 삼성전기, 삼영전자, 대우전자부품, 삼화전기 등 관련 부품업체들이 관련 장비를 상당부분 자체 조달하고 있으며 필름콘덴서는 유럽, 일본산 고급장비나 저가의 대만장비와 충분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특히 MF콘덴서용 권취기의 경우 고려기전(KOEM)이 외산을 빠르게 대체하며 그동안 이 시장을 장악해온 아코트로닉스, 메타 등 유럽업체와 가이도 등 일본업체들의 파상공세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또 프레스, 마스킹, 웰딩기 등에서는 광성기전사가, 포밍 및 테이핑기 등 후처리공정 부문에서는 동우정기가 국산대체는 물론 수출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콘덴서 역시도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등 칩타입 부문에서는 여전히 수입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커넥터의 경우는 각 부품업체들이 자사의 제품과 환경에 맞게 자체 제작, 사용하고 있는 조립기를 제외하고 프레스, 사출기 등 핵심장비는 대부분 일본, 미국, 유럽지역 업체들로부터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또 하네스용 핵심 장비인 압착기 가운데 반자동은 대부분 국산화됐으나 자동차용 자동압착기는 新明和, ZAM 등 일본과 유럽산이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희성기계, 신현기계 등 일부가 자동압착기를 선보인 상태다.
측각-절단-연마(래핑)-주파수 분류-진공증착-웰딩(실링)-에이징 등 주요 7개 공정을 거치는 수정디바이스는 측각기(각도측정기)가 미국(R-보드), 일본, 독일 등지서 전량 수입되고 있는 것을 비롯해 원석절단기(커팅기)가 일부 국산화했다가 판매에서 실패, 현재는 마이어버그(스위스)와 아세아절단기(일본)가 거의 석권하고 있다.
래핑기 역시 일부 국산화됐으나 성능이 많이 떨어져 일본 미쓰나가가 90% 이상 공급하고 있는 가운데 하마이, 스피드팜 등이 나머지를 공급하고 있다. 이밖에 주파수분류기는 휴모, 산세이 등 일본업체에서 전량 수입중이며 증착기(사운더스), 웰딩기(오리진), 테스터 등도 대부분 외산에 의존하고 있다. 다만 에이징기는 국산화가 많이 진척된 편.
수정디바이스는 특히 SMD화가 급진전되면서 관련 제조장비 수입률이 거의 1백%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는 부품이 소형화되다보니 기초 소재인 블랭크 마운팅장비에서부터 관련 장비가 세라믹계 소자를 처리할 수 있는 분야로 바뀌어 수입을 더욱 촉진시키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부품공정, 조립공정, 포장 등 주요 공정이 3분야로 나뉘는 트랜스는 권선기를 비롯해 상당부분의 범용장비가 국산화됐으나 핵심 계측장비는 일본, 미국 등에서 대부분 수입되고 있다. 국내업체로는 석연전자가 다양한 트랜스제조장비를 국산화, 보급하고 있다.
이밖에 소형모터, 전지, 스피커, 튜너, 데크, 스위치, 릴레이 등 나머지 일반부품과 통신부품, 파인세라믹부품 등 유망 부품들도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범용장비의 일부만 자체 조달해 사용하거나 국산화됐을 뿐, 고가의 핵심장비는 대부분 일본, 미국, 유럽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황이 비슷하다.
이처럼 전방산업인 부품산업은 세계적인 생산국으로 발돋움했음에도 관련 장비산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부품산업의 현주소다.
특히 일부 범용 부품장비는 수많은 업체들이 국산화를 추진했다가 도태돼 현재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기도 버거운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핵심부품, 컨트롤러, 설계기술 등 기반 기술력의 취약, 좁은 내수시장, 부품업체들의 맹목적 외산장비 선호의식, 정부의 장비산업 육성정책의 부재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생긴 결과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장비업계 관계자들은 『전자산업이 고도화됨에 따라 일반 부품이 SMD화되고, 관련 생산라인이 인라인 시스템화하면서 장비 국산화의 길은 갈수록 어려워져 장비산업을 이대로 방치하면 머지않아 고사되고 말 것』으로 우려하며 『정부, 기업, 학교, 연구소 등 각계가 전자산업의 뿌리인 부품산업을 육성하기에 앞서 하부구조인 장비산업에 먼저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중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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