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김종헌 통신원> 러시아 최대의 국영 텔리비전 생산 업체인 「리코르드」가 파산하는 등 러시아의 텔리비전 산업이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다.
모스크바 동북부의 볼라지미르시에 위치한 「리코르드」는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전자 산업을 주도한 몇몇 업체들 가운데 하나였으나 그동안 생산량 감소와 운영자금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최근에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리코르드는 블라지미르 지방 중재 법원에 의해 파산 선고를 받아 이미 청산 절차를 밟고 있다. 리코르드의 부도는 이지역의 40여 전자 업체가 가입한 「알렉산드로프 전자 공업 연합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 연합체의 게나지 슈쿠로 부회장은 『리코르드의 파산도 안타깝지만 문제는 알렉산드로프 전자공업 연합체에 속한 국영 기업체들로 이어지는 연쇄부도』라고 지적하고 『전자산업으로 복합돼 있는 우리 지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부의 특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리코르드의 파산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전자 산업의 위기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엘레스크시에 있는 텔리비전 수상기 전문 생산 공단인 「엘타」도 얼마전부터 법정 관리를 받기 시작했으며 페테르부르그시의 텔리비전 생산공장인 「비톤」도 이사회가 최근 자발적으로 파산을 수용하기로 하는 등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앞섰던 러시아의 텔리비전 산업은 지난 91년부터 생산량, 제품성능 양면에서 하강 곡선을 그려왔다. 리코르드의 경우 91년에 50만대의 텔리비전을 생산하던 것이 지난해에는 겨우 1만6천7백대 남짓 생산되었는데, 이는 94년 생산량의 14%에 해당하는 매우 적은 양이다.
러시아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 변혁의 과도기 속에서도 91년에는 전국적으로 3백만대의 텔리비전을 생산했는데, 이 가운데 75%가 컬러 텔리비전이었다. 그러나 91년 말부터 사정이 급속하게 나빠졌다. 93년 무럽부터는 전국적으로 텔리비전 생산량이 4분의 1로 격감하고 그나마도 컬러 텔리비전의 생산은 거의 중단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흑백텔리비전의 수요가 늘어나 지난해 55만대의 흑백 수상기가 생산되어 러시아 텔리비전 산업의 체면을 지켰다는 점일 것이다. 러시아의 흑백 텔리비전 수상기는 구매력이 약한 러시아의 각 지방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일부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컬러 텔리비전은 외국으로부터의 수입품에 밀려 러시아 국내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모스크바의 전자 상가인 「고르부시카」에서도 경찰이 상가 주변을 정리해야 할 정도로 구매자들이 붐비고 있지만 러시아 상표의 컬러 텔리비전을 찾는 소비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상가에서 가장 인기있는 제품은 말레이시아에서 생산된 소니 상표의 텔리비전과 영국에서 생산된 필립스 상표의 제품들이다.
그러나 러시아 텔리비전 산업의 명맥을 유지해 주고 있는 흑백 수상기는 주방용이나 주말 별정용으로 꾸준히 팔리고 있고, 특히 연금 생활자, 지방 거주자를 중심으로 오히려 수요가 확대되는 추세마저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흑백 텔리비전 수상기 가운데 「유나스츠-402」라는 모델은 동남아 등지에서 인기가 많아 경쟁 제품이 없을 정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텔리비전 산업의 위기를 맞아 러시아 정부는 국민용의 보급형 텔리비전 개발 사업을 추진, 텔리비전 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복안을 수립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계획은 대형 국영텔리비전업체들은 하나로 통합해 「유럽의 최저 수준의 기술 수준을 가지면서 가장 값이 싸고 기능이 단순한 국민형 텔리비전」을 개발, 러시아의 각 가정에 보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구상 단계에서부터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국민형 텔리비전 개발에 많은 예산이 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정부 관계자들의 거듭되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국민형」이란 명분아래 숱한 실패나 아픔을 겪었던 국민들은 정부주도의 이같은 계획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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