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판이 새로운 영상정보 전달매체로 빠르게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동안 단순한 문자나 숫자를 표출, 뉴스속보판 등에만 국한됐던 전광판의 용도가 지하철역사, 증권회사, 은행, 생산공장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차량안내, 증권시세, 각종 매장홍보, 생산량 현황, 상품광고 등 다양한 내용을 전달하는 뉴미디어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발광다이오드(LED)를 이용한 전자제품용 디스플레이 및 램프시장의 침체가 가속화하면서 전광판이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응용시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제는 시장규모나 기술수준에서 전자산업의 새로운 고부가가치 품목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으며 디스플레이분야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점유하게 됐다.
현재 국내 전광판 시장규모는 올해 기준으로 약 2천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이는 대형 전광판시장에 국한된 수치고 산업용 전광판을 비롯한 중소형 전광판시장까지 포함한다면 2천5백억∼3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특히 작년 풀컬러 전광판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시장규모가 1천억원 정도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1년 사이에 크게 성장한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전광판이 고부가가치 제품이기 때문이다. 동화상을 구현할 수 있는 128m 크기의 대형 풀컬러 전광판의 가격이 대당 30억∼40억원에 이르는 점을 감안할 때 풀컬러 전광판 한 대만 납품해도 소기업의 한해 매출액과 맞먹는다는 얘기다.
또한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여타 국가의 전광판시장이 아직 초기단계인 점을 고려한다면 단일규모로는 어떤 시장 못지 않게 가능성이 무한한 것이 바로 전광판시장이다. 여기에 2002년 월드컵 특수, 사회간접자본 시설확충 등 잇단 호재가 포진하고 있으며 네온사인 등 기존 광고매체를 대체할 때 잠재시장 규모는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내 전광판시장의 급속한 성장배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 하나는 국내 전광판업계의 부단한 연구개발과 축적된 노하우를 통해 얻어낸 앞선 기술력이다.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에 버금가는 시스템 제작기술이 가격과 품질 면에서 경쟁력이 있는 전광판 생산을 가능케 하고 이를 기반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이 주효해 국내 전광판시장을 활성화시켰다는 설명이다.
국내 전광판시스템 제작기술은 전자산업의 고속성장만큼이나 빠른 템포로 발전해 왔다. 먼저 표출화면의 경우 기존의 단순한 문자에서 각종 CF영상물, 그래픽, 비디오화면 등 동화상을 구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색상도 기존 단색의 조잡한 화면구현에서 적, 녹색 LED소자를 통한 4천여가지 색상구현에 성공했고 현재는 적, 녹, 청 LED소자를 채용, 천연색을 나타낼 수 있는 1만6천가지의 색상구현이 가능하게 됐다. 이에 따라 경기장에서 문자와 숫자만을 표출하던 스코어보드로 출발했던 전광판이 최근에는 시내 한복판에서 뉴스를 비롯한 각종 영상정보를 실시간으로 구현할 수 있는 첨단 영상매체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작년에는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2백56단계의 휘도조절을 통한 1만6천가지의 색채를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는 고해상도 풀컬러 전광판을 개발, 국내 디스플레이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성과도 거뒀다. 최근에는 순수 녹색 LED를 채용한 풀컬러 전광판 국산화에도 성공, LED소자를 제외한 영상구현 관련 소프트웨어기술과 영상, 제어장치를 비롯한 시스템 조립기술은 세계 최고임을 명실공히 인정받았다.
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의 하나는 컴퓨터를 통한 전광판 영상구현을 실현한 점이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수만개의 LED소자를 채용한 픽셀로 구성된 화면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일본에서 도입한 EP롬이나 롬팩을 사용했다. 즉 이미 프로그래밍된 내용 이외에는 거의 화면수정이 불가능했다. 화면교체를 위한 프로그램 입력기인 라인에디터가 있기는 했지만 이는 프로그램 수정 및 오동작 개선이 매우 까다로운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다. 이를 개선해 컴퓨터를 이용, 한글, 영문 등 문자데이터와 각종 그래픽데이터를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한 것이다.
컴퓨터와 전광판의 결합은 근거리통신망(LAN)이나 전용선을 통해 보다 빠르고 많은 양의 정보를 표출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간단한 조작으로 수시로 프로그램를 교체할 수 있어 정보의 다양성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
나아가 현재는 무궁화위성 등 인공위성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어느 지역에서나 실시간으로 고해상도 전광판에 표출할 수 있는 시스템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카메라, VCR, CD기 등 인터페이스 장비를 이용해 다양한 기능의 영상 및 그래픽을 연출할 수 있게 됐다.
이렇듯 국내 전광판시스템 제작기술은 핵심소자인 LED를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곳에 내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는 일본 등 대부분의 디스플레이 강국이 대기업 중심으로 전광판사업을 추진한 반면 국내에서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발전해 온 사실을 상기할 때 더욱 값진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전광판시장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70년대 초 경기장용으로 첫 선을 보인 전광판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 기술수준 면에서 시쳇말로 별볼일 없었다. 기술발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이었다. 비록 당시는 주로 전량 부품을 수입, 조립하는 수준이었지만 국제적 행사가 호재로 작용, 전광판 수요가 급속히 일어나면서 전광판 관련 연구개발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90년대 초 걸프전에 따른 전력사용 규제방침으로 전광판시장이 한동안 주춤했다. 전광판이 과소비전력의 대표적인 품목으로 지적되면서 동력자원부가 전광판 설치를 규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광판시장이 다시 회생한 것은 작년 1월1일자로 전광판설치 제한고시가 해제되고부터다. 그러나 그 해 전광판업계는 다시 「전광판 수입」이라는 새로운 골칫거리로 또한번 홍역을 치르게 된다.
일부 언론사의 전광판 수입추진은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산되고 전광판업계는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일본과 대등한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 풀컬러 전광판 국산화에 집중했다. 그 결과 일본에 이은 세계 2번째 풀컬러 전광판 보유국가로 올라서는 커다란 성과와 함께 이같은 고부가 제품의 판매 및 전광판시장 활황에 따른 매출증가라는 떡고물도 쥐게 됐다.
이 덕택에 작년 말에서 올 중반까지 전광판업계는 성장가도를 질주해왔다. 전광판시장에 뛰어드는 신규업체도 큰 폭으로 늘어났다. 대형 전광판 설치대수도 서울시를 기준으로 할 때 95년까지 20개이던 것이 올해 들어서만 18대가 추가로 설치돼 현재 38대의 전광판이 서울 야경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호황을 지속하던 전광판시장도 올 하반기를 정점으로 전반적인 경기침체와 맞물려 주춤하고 있다. 최근 들어 주문량이 격감하고 있으며 규모나 자본력을 갖춘 대형 전광판업체를 중심으로 국내시장보다는 해외시장을 적극 공략하는 추세가 이를 반증한다. 이를 국내 전광판시장이 이미 호황의 정점에 달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않다.
이에 따라 대형 전광판업체는 아직도 전광판시장의 처녀지나 다름없는 미국, 유럽 등 해외 신규시장을 겨냥, 탈출구를 모색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원가절감을 통한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생산구조도 시스템 제작만을 고집하던 방식에서 부품까지도 생산하는 토털생산체제로 급속히 바뀌어가고 있다.
또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틈새시장을 겨냥한 옥내용 전광판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증권시세판의 주류를 이뤘던 옥내용 전광판이 이제는 증권회사는 물론 은행, 예식장, 실내 스포츠장 등으로 적용범위가 서서히 확대되고 있다. 광고물이 주를 이루던 지하철 구내에도 안내표시판용 전광판 채용이 본격화하고 있으며 각종 정보제공 안내판으로 사용될 역사용 전광판 개발도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최근에는 전 산업계에서 공장의 통합생산시스템 적용이 본격화함에 따라 생산현황, 재고, 불량품 확인 등 분야별 현황을 표시하는 산업용 옥내 전광판의 수요도 크게 늘고 있다.
현재 전광판업계가 가장 시급한 문제로 지적하는 사안은 전광판 품질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LED칩의 국산화문제다. 이와 관련, 최근 LG전자에서 청색 LED를 개발하는 등 반가운 소식이 들리지만 아직도 전반적인 품질, 가격 측면에서는 미흡하다. 지금 양산되는 적, 녹색 LED칩도 휘도, 발광효율 등 품질 면에서는 일본업체에 크게 뒤떨어진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업계에서는 칩 국산화가 높은 기술력과 대규모의 자본을 필요로 하는 점을 고려할 때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이 주도적으로 나서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전광판이 향후 무역수지를 개선할 수 있는 경쟁력있는 수출품목임을 감안, 정부도 전광판산업 육성을 위한 장, 단기적 대책을 마련하는 등 실질적인 정책지원을 취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업계가 지적하는 또하나의 과제는 향후 시장개방에 대응, 다른 방식의 전광판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의 경우 LED를 이용한 전광판이 주종을 이루지만 LED에 비해 해상도가 뛰어난 음극선관(CRT)방식이나 가시각도에서 우위를 보이는 형광방전램프(FDT)방식에 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질서 개선도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개입찰에서 다반사로 벌어지는 저가 덤핑사례, 경쟁업체 흠집내기 등 타업체 비방을 비롯해 업계에 만연해 있는 병폐를 시급히 바로잡고 공정한 경쟁체제로 돌아서야 한다는 여론이 부끄럽고 당연한 얘기지만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앞으로 전광판은 기존 1차원적인 표시매체를 대체하면서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용도별로 세분화하면서 첨단기능을 가진 제품이 봇물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통해 전광판은 정보시대를 실현하는 전자 디스플레이 매체의 하나로 우리 생활 속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 것이 분명하다.
〈강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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