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수요가 있어야 기술개발도 촉진

PC 메이커간 또 한차례의 가격경쟁이 시작될 조짐이다. 이미 일부 업체는 바겐세일을 시작했다. 연말이 가까워진다는 계절적 요인도 있겠으나 현재 바람이 일기 시작한 가격경쟁은 현재의 개념을 한단계 끌어올릴 신기술이 등장하지 못함으로 해서 PC의 라이프사이클이 길어지는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한다. 현재 보급이 충분히 이루어진 펜티엄을 대체할만한 중앙처리장치(CPU)가 아직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 P6 등 기술적으로는 대체 가능한 제품들이 개발됐음에도 불구하고 시장 대체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응용소프트웨어 개발이 하드웨어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더 이상의 CPU 성능향상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PC 수요가 더 이상 늘어날 여지가 없어 라이프사이클이 길어지고 그러다보니 기술적 차이가 별로 없는 제품들간에 가격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소프트웨어 개발 역시 수요가 적으니 주춤거릴 수밖에 없다.

수요없이 지속적인 기술개발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산업 발전에는 적정한 소비가 필수적이다. 물론 소비과잉이 나타날 경우 기업의 안일과 나태를 초래함으로써 오히려 기술개발이 지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소비가 지나치게 위축되어도 기술발전은 지체된다.

요근래 정부의 경제정책이 우왕좌왕, 허둥지둥하는 듯 보이는 까닭이 근본적으로 정책의 목표 대상을 분리시켜 판단하는데서 발생하는 결과는 아닌지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기업이 앞에서 끌고 소비자이자 노동자인 대다수 국민은 이끌려가던 고도성장기의 직렬식 자전거 매커니즘으로는 이제 세계무대에서 점하고 있는 비중을 유지시키기 어렵다. 이제는 기업과 국민일반을 병렬적 경제주체로 바라보고 기업의 생산이 국민의 소득을 증진시킴으로써 소비를 촉진시키고 이것이 다시 기업의 기술개발을 부추길 수 있는 자동차 매커니즘으로 안정과 성장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도성장기의 단맛에만 젖어서 그 시기의 경제 운용방식을 답습하려 해서는 안정을 해치는 것은 물론 지속적인 성장도 어렵게 한다.

경제정책이 국민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기업을 키우면 기업은 정부에 무조건 복종하던 고도성장기에 우리 경제가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라야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고 어느 나라도 우리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분명 달라졌다. 정책이 더 이상 한편으로만 기울어서는 편애를 받는 쪽에도 해독이 미칠 뿐이다.

이제 기업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지속적 성장의 기반이 될 적절한 소비 수요처일 것이다. 정부는 기업경영적 문제에 매달리기보다 이 부문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한다.

국내 반도체업체들이 내년중에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연구개발(R&D)투자를 늘릴 방침이라지만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에만 편중된 생산구조를 바꿔가려 해도 비메모리 분야의 수요처를 갖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비메모리 수요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가전제품이나 통신기기 등은 국내 산업이 결코 낮은 단계가 아니지만 전반적인 산업이 균일한 성장을 못해온 우리 경제구조에서 비메모리 반도체 가운데서도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고도기술제품의 경우 소비처를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 각부문의 고른 성장만이 앞선 기술의 지속적 수요를 창출하면서 전반적 성장을 이끌 수 있다. 세계시장이 제로섬게임의 장이라면 그럴수록 국내에서의 균형잡힌 성장이 긴요한 시기에 우리 경제가 도달해 있는 것이다.

이제 조급증을 벗어나 거시적 관점에서 다양한 변수를 수용할 수 있는 경제정책적 안목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요구된다. 시장기능을 믿고 기다릴 줄도 아는 정책,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판단할 줄 아는 감각있는 정책당국의 자세가 아쉽다.

말에 채찍을 가하는 마부의 기술이 아니라 자동차 점검도 할 줄 아는 운전기술을 발휘할 그런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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