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40);정착기 (4)

국산신기술 제품 보호 조치와 수입자유화

국산 마이크로 컴퓨터를 생산하던 삼성반도체통신(89년 삼성전자로 합병)과 금성사가 72년 제정된 기술촉진법을 들어 이른바 「국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서」를 과학기술처에 제출한 한 것은 84년 3월이었다. 보호 요청한 신기술 제품은 「삼성 수퍼마이크로-16(SSM-16)」과 「금성 마이티컴퓨터-5010(GMC-5010)」으로, 양사가 자체 개발한 16비트 마이크로 컴퓨터 제품이었다. 기술촉진법 제정 이후 컴퓨터에 대한 국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서가 제출된 것은 전자산업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당시 금성중앙연구소에서 「GMC-5010」의 개발을 지휘했던 K씨(현재 미국거주)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기술이 세계적으로 보편화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국산화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개발기술 자체를 정부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보호요청서를 제출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보호대상으로 지정되면 해당 신기술 제품은 정부기관 등에서 컴퓨터를 구매할 경우 우선 구매되는 특전을 얻을 수 있었죠.』

대상 제품 가운데 「SSM-16」은 82년 과학기술처의 기업주도 특정연구개발과제로 선정돼 삼성반도체통신과 출연연구소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방승양 박사(현 포항공대 교수)팀이 2년 동안 공동 개발한 것이었고 정부예산을 포함, 모두 22억원의 총 연구개발비가 투입됐다. 이 제품은 모토롤러 68000(10) 기반의 주기판과 입출력 보드로 이루어진 하드웨어에 미국 AT&T의 유닉스 운용체계 「시스템 버전릴리스7(SVR7)」을 이식한 것이었다.

「GMC-5010」 역시 82년 과학기술처 기업주도 특정연구사업의 일환으로 금성사 중앙연구소와 KIET의 방승양 박사팀이 2년여에 걸쳐 공동 개발한 것이었다. 투자된 총 연구개발비는 10억원이었다. 이 제품은 「SSM-16」과 달리 인텔 8086(8) 기반의 주기판에 PC 운용체계인 「CP/M」과 「PC DOS」(MS DOS의 IBM 버전)를 이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특정연구에 투입된 정부 예산비율은 「SSM-16」이 30%(6억여원), 「GMC-5010」이 70%(7억여원)나 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과기처와 문교부가 추진한 교육용 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에 1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점을 감안한다면 이같은 연구개발비 규모는 단일 프로젝트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제출된 보호요청서에서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사는 자사 제품에 대해 각각 2가지씩 신기술 보호를 신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이었는지, 보호를 신청한 2가지 신기술의 내용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2가지 신기술 가운데 하나는 하드웨어 설계에서 시험까지를 국산화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 운용체계를 자체 설계한 하드웨어에 이식했다는 것이었다.

두 회사의 국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서가 접수되자, 과기처는 아연 긴장했다. 보호요청서가 접수됐다는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요청서 제출은 오히려 과기처측과 사전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아이디어는 과기처가 먼저 서둘러 만들어 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시 정보기술관과 소속 사무관이던 P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과기처 입장에서 보면 10억원이 훨씬 넘는 예산을 투입해 개발한 국산 마이크로 컴퓨터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갓 시제품 수준을 벗어난 「SSM-16」과 「GMC-5010」이 성능과 지명도에서 외국 제품과 경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따라서 과기처는 특정 연구에 참여한 기업에 정부기관 등에 대한 판로를 확보해줌으로써 최소한 투자비 정도는 회수할 수 있게 할 요량이었던 겁니다.』

과기처의 최대 관건은 접수된 요청서에 대해 과연 주무장관(경제기획원, 상공부)의 찬성 소견을 얻어 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주무장관들의 소견은 반대입장일 것이 분명했다. 기술개발촉진법 시행령 (당시 81년 2차개정본) 제10조 규정에 따르면 국산 신기술 제품의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 여부에는 주무장관의 의견을 미리 듣게끔 돼 있었다. 물론 이 때 주무장관이 반대의견을 제시했다고 해서 반드시 보호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하지만 기존 폴리에스테르 필름이나 단열재 등의 경우에서 보여진 것처럼 주무장관의 의견은 제품의 판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과기처는 84년 4월 한달 동안 두 회사가 보내온 보호요청서를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KIET 등 연구소와 대학 등에 보내 기술적 자문을 얻었다. 그런 다음 그해 5월 말 관계부처와 단체 관계자 및 전문가의 의견을 검수하고 통합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관계부처란 물론 경제기획원과 상공부였다. 단체 대표로는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사를 회원사로 거느린 한국전자공업진흥회 관계자가, 전문가 대표로는 KAIST와 KIET 연구원을 비롯한 대학교수들이 참석했다.

한편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사는 앞서 접수시킨 보호요청서에서 직시한 2가지 신기술에 대한 다양한 보호방법을 제시해 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정부가 일정기간 동안(2∼5년) 자사 제품과 유사한 외국기종의 수입 및 중복 제조를 규제해 줄 것과 유사기술의 도입을 금지해 줄 것 등이었다. 이같은 요청은 사실상 정부가 두 회사를 제외한 나머지 민간 컴퓨터회사에 대해 일정기간 동안 관련사업을 중지시켜 달라는 것과 같았다.

수입규제 등의 요청에 대해 두 회사가 제시한 이유도 그럴 듯했다. 우선 정부가 앞장서 국산 신기술을 장려하고 외화를 절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좀 더 궁극적인 것은 엄청난 규모의 투자비를 회수하고 판매시 적정 이윤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84년 5월 말 과기처 회의실에서 각계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던 의견 검수 및 통합과정은 예상대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각축장이 되고 있었다.

먼저 발언에 나선 전문가그룹은 뉘앙스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 삼성과 금성의 신기술 보호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타당론을 펼친 전문가 중에는 「SSM-16」이나 「GMC-5010」의 개발에 참여했던 이도 있었다.

『물론 신기술이라는 의미의 기준은 모호하다. 하지만 이번 제품은 개발과정이 처음부터 국내기술로 이루어진 점을 높이 살 필요가 있다. 특히 막대한 연구비와 인력을 투자해 일궈낸 운용체계 이식과정은 분명 신기술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응분의 조치가 따라줘야 할 것 아닌가.』(KIET측 P박사)

컴퓨터의 도입(수입)심의를 관장해 온 상공부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상공부는 줄곧 국내 컴퓨터산업의 다양화와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제품수입과 기술도입을 자유화하자는 원칙론을 고수하며 수입규제와 기술도입 금지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AT&T 유닉스 소스코드는 세계 어느곳에서든지 자유롭게 구할 수 있으며 이를 하드웨어에 이식하는 기술도 이미 보편화돼 있다. 그런 기술을 특정연구개발 결과라 해 보호하자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또 유사기종의 범위에 대한 규명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기업들이 제시한 보호방법보다는 다른 지원책을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L서기관)

30만달러 이하의 컴퓨터에 대한 도입(수입)심의 업무를 대행하던 상공부 산하단체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역시 아무래도 상공부 의견을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회원사 입장을 거스를 수만도 없는 처지였다.

『몇년 전부터 10만달러 이하 16비트 컴퓨터의 수입은 규제하지 않고 있다. 유사기종의 수입규제는 수입업자가 도의적으로 판단할 일이라고 본다.』(P이사)

변수는 예산배정과 공정거래 등의 정책과 관련된 경제기획원이었다. 과기처가 줄곧 「SSM-16」과 「GMC-5010」에 채용된 신기술의 영향력과 파급성과에 가치를 두고 있었던 데 반해 경제기획원은 두 제품이 신기술 보호조치됐을 경우 국내외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점을 두고 있었다. 결론은 완곡한 반대였다.

『수입규제는 수입자유화시책에 역행하며 중복제조 규제 역시 자율경쟁체제에 위반된다. 컴퓨터 기술도입을 막아서도 안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두 제품을 정부가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두 제품은 이미 정부가 상당수 예산을 지원함으로써 보호받지 않았는가. 또 세제감면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는가. 이미 보호받고 있는 제품을 중복 보호한다면 특혜의혹을 살 것이다.』(C사무관)

이같은 의견수렴은 그러나 형식에 그치는 것이었다. 84년 7월 3일 과기처는 역사상 최초로 두 민간기업이 신청한 컴퓨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에 대해 「보호키로 결정했음」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뒤따른 보호조치로는 「SSM-16」과 「GMC-5010」에 대해 「정부 및 투자기관 등에서 우선 구매토록 조달청장에게 요청」하는 것이었고 그 기간은 「조치일로부터 1년」으로 정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SSM-16」과 「GMC-5010」의 신기술 제품 보호조치는 5공화국 후반에서 6공화국 초반에 본격화된 국가기간전산망 시스템 구매과정이나 중형 컴퓨터(타이컴) 개발정책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음은 물론이다.

〈서현진 기자〉

사족:「SSM-16」은 그 후 삼성그룹이 중형 컴퓨터 개발을 전략분야로 꼽은 데 힘입어 「SSM-32로 업그레이드되는 등 제품수명이 연장됐으나 「GMC-5010」은 판매실적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단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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