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전자산업의 「巨大」 콤플렉스

한동안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국내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미국 흑인인권운동의 구호로 등장했던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구호를 차용한 이 유행어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후유증으로 너나없이 큰 것, 큰 건에만 매달리는 세태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던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유행어마저 슬그머니 사그라들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巨大」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듯하다.

전자산업만 예로 봐도 그렇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부문에 집중투자로 승부수를 내는 데는 분명 성과를 올리고 있으나 70∼80년대 고도성장의 미약에취한 우리가 그동안 하찮게만 여겨온 소형가전제품은 야금야금 외국산에 자리를 내줘 이제 국내 생산업체들의 멸절이 우려될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한 민간 연구소가 내놓은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형가전은 아직 수입침투도가 10% 미만이지만 소형가전은 이미 50%를 넘어섰다고 한다. 심한 경우98.5%에까지 이르는 품목도 나타났다.

그나마 국산은 판매가격 기준, 수입제품은 수입가격 기준으로 조사된 것인만큼 판매가격으로 비교하면 수입품의 시장점유율은 이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반도체 생산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세계 1위를 외치는 동안 외국의 가전 메이커들은 마치 바닥 가까이에 출입구를 갉아 만드는 쥐처럼 국내 가전시장을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소형가전의 위기는 결코 이를 생산하는 중소기업들만의 위기가 아니다. 소형가전이 겪고 있는 판매부진의 밑바탕에는 세계적 명성을 내세운수입품의 브랜드 인지도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감안해 봐야 한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수입이 자유로운 소형가전으로부터 쌓아가는 브랜드 인지도는 결국 수입선 다변화가 해제되는 시기에 맞춰 대형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이 수입품 판매에 앞장서며 국내 중소기업들로부터 공급받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물량마저 없앤 결과는 결국그들이 수입판매한 제품의 국내 인지도만을 높여주는 제 무덤 파기가 될 수있는 것이다.

국내 대형 전자업체들이 「세계적」인 것을 내세우며 대량생산, 대량 이윤창출이 가능한 분야로만 관심을 집중시키며 국내 중소기업이 고사되거나 말거나 무관심한 태도는 결국 우리 전자산업 전체로 봐서 밑돌 빼서 윗돌 쌓아가기 만큼이나 위태로운 일이 되는 셈이다.

물론 대기업 입장에서 보면 소형가전이야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미미하고 따라서 그동안도 그저 구색용으로 OEM 공급물량을 소량 갖추는 데 그쳐왔다. 그러니 수입가전이면 어떻고 국내 OEM 가전이면 어떻냐, 쉽게 팔리는쪽을 택하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형가전이 대기업 OEM으로든 생산업체 독자 브랜드로든 시장을 지켜줄 때 소비자들의 국산제품 이용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결국 대기업의 대형가전 시장에 방패막이 역할을 해줄 것이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을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대기업 자신의 시장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 소형가전업체들이 고전하는 데는 대기업의 외면만이 문제가 아니다.

정부 또한 작은 시장이라는 이유로 경쟁력이 취약한 중소기업 시장부터 앞장서 개방함으로써 결국 이 부문을 초토화시켜가고 있다. 수입개방은 그렇다치고 특별소비세 부과만 해도 왜 수입가격 기준이어야 하는지 국내 생산자들은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같이 작은 시장을 소홀히 보는 우리의 태도는 가전에만 국한된 것이 물론 아니다. 우리가 갑자기 자부심을 갖고 다소 자만에 빠지게 했던 메모리반도체 부문만 봐도 우리는 토대도 닦기 전에 기둥만 대충 세우고 지붕 얹는식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반도체 장비시장은 우리가 추월하고자 애쓰는 일본산이 절대적인 비중을차지하고 앞으로 고부가가치를 기대할 만한 플래시 메모리 부문은 일본업체들만의 선두경쟁에 접근할 엄두도 못내고 있다. 대량투자, 대량생산이 가능한 D램에만 매달린 결과 한 분야만 기형적 성장을 하고 그동안 바닥 가까운곳에선 속속 구멍이 커지고 숫자도 늘어가기만 한 것이다.

기반 기술도 취약한 상태에서 고급기술이 발전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세계 전자산업에서 막대한 지배력을 갖춘 일본은 결코 소형가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큰 것만 좋아하는 우리가 보기에 하찮아 보였음직한 게임산업에서는 일본을 따를 나라가 없고 그 시장은 계속 커져만 간다. 가전의 개념에 바탕을 둔신개념 기술들로 세계 표준화 경쟁에 당당히 나서는 일본을 우리가 이길 방안이 무엇인지 광복 51돌을 넘기며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