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컴퓨터 파노라마 (12);적응기 (7)

산업의 형성 (하)-SW산업의 태동

70년대가 되어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의 한 축이 지난호에 언급했던 것처럼 하드웨어(HW) 판매였다면 또다른 축은 소프트웨어(SW) 용역이었다.

SW 용역은 크게 3가지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천공카드에 구멍을 뚫어주는 키펀치(Key Punch)용역.HW 도입기관의 업무개발 용역.외국산 패키지를도입해서 국내현실에 맞게 개량해 주는 업버전 용역 등이다.

키펀치 용역은 단순업무이긴 했지만 한때 정부의 수출장려 산업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업무프로그램 개발은 비교적 규모가 큰 기업에서 이루어 졌지만키펀치 용역처럼 활발하지는 못했다.

외국산 패키지를 업버전하는 일은 주로 외국계 대형 HW공급사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는 SW산업보다는 HW를 판매하기 위해 부대서비스 성격이 훨씬 더강했다. 한국IBM이 73년 대한항공에 "IBM 1130"을 공급하면서 68년 미본사가아메리카항공사와 공동 개발한 온라인 예약시스템 "PARS"를 도입, "KALCOSI"이라는 이름으로 현지화한 것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 가운데 70년대 중반까지 가장 활발했고 우리나라 SW산업의 토대를 닦게해준 분야는 단연 키펀치 용역이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사실 키펀치 용역이 SW분야일 수는 없었다. 키펀치 용역이란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기억시키기 위해 종이카드나 종이테이프에 구멍을뚫고(Punching) 검공(Verifying)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작업과정에는극히 일부이기는 했지만 잘 훈련된 프로그래머가 필요했다. 따라서 초창기키펀치 용역은 당연히 SW분야에 포함됐고 또 SW산업을 대표하는 업종이기도했다.

컴퓨터 마인드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키펀치 용역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사뭇 긍정적이기까지 했다. 첨단 직종이라는 명분아래 사회적으로매우 전도유망한 직업으로 인식되는가 하면 키펀치 작업과정을 가르쳐 주는1~2개월 과정의 학원교습은 언제나 여성 수강생들로 붐볐다. KIST와 같은공공기관에서 개설한 수료과정은 70년대 말까지도 높은 인기를 누리며 젊은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천공카드시스템(Punch Card System)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60년대 초반부터이다. 그러나 당시는 용역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경제기획원 등에서 직접 직원을 고용, 인구센서스 처리와 같은 고유업무를처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60년대말 컴퓨터 도입이 이뤄지고 한국전자계산소.KIST전자계산실.한국생산성본부 등이 키펀치요원 양성과 함께 공공기관 용역업무를 따내면서 키펀치 용역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키펀치 용역업을 표방하고 설립되거나 업종 전환한 기업현황을 보면 72년까지 10개이던 것이 73년에는 16개, 74년에는 23개사로 각각 늘어났다. 그러나이때 키펀치 용역회사들의 주 매출원은 내수보다는 미국과 일본지역에 대한수출이었다. 내수의 경우 74년까지 컴퓨터를 도입한 기관과 기업들을 중심으로 50여곳이 독자적인 PCS시설을 갖추고 자체업무를 처리해 오고 있었다.

국내 키펀치 용역에 의한 SW수출 1호는 69년 한국전자계산소(현 KCC)로서이를 시발로 KIST전자계산실(현 시스템공학연구소).서울컴퓨터센터.광운대전자계산소.나라교역(현 청호컴퓨터).한국보험전산.인터내셔널 컴퓨터리소스(ICR).동일컴퓨터센터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또 동일교역.동양비지네스 등 일본계 합작회사와 한국키보드 등 영국계 합작회사 등도 설립돼 키펀치 구멍수에 따라 달러의 양이 바뀌는 수출일선에 나섰었다.

키펀치 용역에 의한 SW수출 상황은 69년 한국전자계산소가 대일 수출을 개시한 이래 70년대 말까지 과학기술처 정보관리실이 매년 산출한 통계의 초기기록을 보면 69년 5천달러, 70년 2만달러, 71년 5만5천달러 등 소규모였다.

그런데 72년에는 전년대비 11배나 되는 60만5천달러에 이르고 73년에는 이의4배인 2백44만달러, 그리고 74년에는 4백68만달러 등으로 급증하고 있음을알 수 있다.

이처럼 수출외형이 급증하자 수출만능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던 정부는 상공부를 통해 키펀치 용역을 장려하려는 각종 시책을 펴게 된다. 대표적인 시책은덤핑수출에 의한 업계간 과당경쟁을 방지하고 요원 양성 및 확보, 시장개척등의 공동 추진을 목적으로 72년 12월 한국전자계산용역수출조합을 결성케한 것 등이다.

정부는 이 조합을 통해 해외시장 정보를 수집하거나 영세 조합원 업체들을대상으로 내국신용장제도를 활용케 했으며 당시 융성하던 대형 수출상사와의계열화 등을 추진해 나가도록 유도했다.

키펀치 용역수출은 그러나 결코 바람직한 것은 못됐다. 주요 수출국인 미국과 일본이 한국에 키펀치 용역을 의뢰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단지 인건비가저렴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과기처의 기록을 토대로 72년 당시 각 3국의 키펀치 요원에 대한 시간당임금을 비교해 보면, 미국이 5.7달러.일본이 3.65달러였던 반면 한국은 겨우0.33달러에 불과했다.

미국에 비해 17배, 일본에 비해서는 11배나 저렴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용역업체들은 자본력이 영세해서 PCS장비를 IBM이나 스페리랜드 등으로부터 임차해서 사용하던 터였다. 이를테면 PCS장비 임차에 대한 비용부담이수출원가의 50% 정도를 차지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악조건은 상공부의 수출장려 시책에도 불구, 전혀 개선되지 못했으며74년부터는 경쟁업체 증가와 채산성 악화로 중도 하차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다. 76년 이후 살아남은 기업이나 기관은 붐이 일기전인 72년과 같은 10여개정도였다. 이들은 한국보험전산에서 이름을 바꾼 한국전산.주식회사로 전환한 한국전자계산.한국비지니스컨설턴트(KBC).KIST전산실.부녀복지회.광운대전자계산소 등 비교적 공공기관이나 기업규모가 단단한 곳들 뿐이었다.

한편 키펀치 용역수출이 SW산업이라는 이름으로 활성화되고 있을 무렵, 일부기업과 공공기관들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SW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67년에 설립된 한국전자계산소를 비롯, KIST전자계산실.한국보험전산.서울컴퓨터센터 등이 70년대 초반 본격적인 SW개발을 주도한 회사들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은행컴퓨터 공동이용센터인 금융기관 전자계산본부.정부전자계산소등이 가세함으로써 초창기 우리나라 SW산업은 그런대로 위용을 갖춰나가기시작했다.

전문SW센터 운영이라는 취지로 시작된 SW개발은 그러나 수요가 늘 넘치는것이 아니어서 한편으로는 키펀치 용역과 같은 단순사업을 통해 회사를 유지해나가면서 외부로부터 업무프로그램 용역을 위탁받아 그 영역을 넓혀가는식이었다.

한국전자계산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IBM 직원이었던 이주용(현 KCC회장)이 미국에서의 유학경험과 IBM에서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설립했는데키펀치 용역에서부터 정부기관의 전산화 타당성과 설계용역.정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분석.우리나라 정보화마인드 조사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보기드문 용역들을 처리, 명성을 얻었다.

KCC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정부 및 주요 공공기관의 용역을 사실상 독과점했다. 특히 키펀치 용역수출이 벽에 부닥치면서 KCC는 재빠른 변신을 통해 일본 생산성본부와 일본 사학재단 등으로부터 특허관리업무.사학공제업무 등의 프로그램 개발을 위탁받아 74년까지 1백만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하기도 했다.

체신부의 전화요금 전산화 등 정부용역으로 노하우를 쌓아가던 KIST전자계산실도 72년께부터는 해외수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미기획단(USA/KPA)의 병참업무 전산화.미공보원(USIS)의 자료처리.미8군의 워게임(War Game)시뮬레이션SW 개발 등이 70년대 초반 KIST전산실의 대표적인 수출용역이었다.

서울컴퓨터센터는 68년 한국자동차보험.한국유리.경성방직.삼양식품 등 11개업체가 공동 출자,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2천만원의 자본금으로 출범해 출자회사들의 업무프로그램 개발을 전담했다.

또 이사장에 주요한(전 부흥부장관.상공부장관,시인).감사에 전택■(전 YMCA 총무) 등 명망가들을 영입, 출범한 서울컴퓨터센터는 71년 IBM의 "IBM 360 40", 72년 컨트롤데이터의 "CDC 3150" 등 대형컴퓨터 등을 도입, 당시 SW센터로서는 가장 화려한 위용을 갖춰 나갔다.

서울컴퓨터센터의 센터 운영방식은 독특해 주주기업들의 용역처리와 전산요원 양성을 우선하되 주주기업들이 독자적인 전산시설과 처리능력이 생기면주식을 반납시키고 새로운 주주를 영입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컴퓨터센터는 화려한 장비규모와 달리 주주회사나 일반회사들의용역 의뢰 대부분이 단순 통계업무에 집중돼 컴퓨터 활용이나 센터 운영의수지타산 측면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같은 한계때문에 업계에서 가장 주목을받았던 서울컴퓨터센터는 75년말 소유주가 민경현(현 한국정보처리전문가협회 회장)에게 이양되면서 명칭도 서울컴퓨터학원(현 서울정보처리학원)으로바뀌게 됐다.

KCC.서울컴퓨터센터 등 보다는 늦게 출범했으면서 70년 중반부터 80년대에이어 90년대까지 줄기찬 성장을 거듭한 회사가 한국보험전산이다. 한국보험전산은 69년 은행들이 금융기관 전자계산본부를 출범시키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대한생명 등 보험회사들이 이에 자극받아 전산화 경험이 많은 일본의 교에이(협영)보험을 끌어들여 한일합작으로 설립된 회사이다. 한국보험전산은 출자회사들의 성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내 보험산업의 전산화를 통해단기간에 육성한다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초기 자본금 45만달러로 출범한 한국보험전산은 교에이보험의 전산화모델을도입, 보험업무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전표의 분류작업 등의 전산화에 착수했다. 우수한 인재들이 집결한 한국보험전산은 이어 72년 10월 상호를 현재의한국전산(KICO)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SW 외주개발과 시스템 대여사업에 나섰다.

특히 시스템 대여사업은 대여기관이 자체시설을 도입할때까지 업무처리를대행해 주는 방식이었다. KICO의 시스템 대여사업이 활성화되면서 과기처는73년 "분당 컴퓨터사용 단가표"라는 것을 정해 놓았는데 분당 직접처리(Foreground Job) 이용료는 6백70원, 이면처리(Background Job) 이용료는 4백원이었다.

70년 중반이후 KICO가 주력했던 외주용역은 삼성물산.신세계백화점 등 삼성그룹 계열사들이었다.

KICO를 지휘하던 전상호(현 농심데이타시스템 사장)가 86년 설립된 삼성데이타시스템의 초대 사장에 영입된 것도 이같은 연유에서 였다.

서현진기자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