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택을 개발 책임자로 발탁 전기통신연구소 최순달 소장이 240억원 프로젝트를 연구소의 핵심 연구개 발과제로 삼기로 결정하고 나서 오명 차관에게 내건 하나의 조건은 삼성그룹 산하로 넘어간 한국전자통신(주)에서 상무이사로 일하고 있는 양승택을 스카 웃해 달라는 것이었다. 필요한 인원은 누구든 확보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오 차관은 즉석에서 한국전자통신 이춘화 사장을 체신부로 불러 부탁했다.
"지금 정부에서 한국형 시분할전자교환기 개발사업을 "내셔널 프로젝트"로 삼기로 하고 전기통신연구소에 240억원이란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서 개발키 로 했는데, 연구소측의 요구가 귀사에서 상무이사로 근무하고 있는 양승택 박사를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귀사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인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국가적인 사업이니 만큼 밀어 주셔야겠습니다.
"아이구, 왜 하필이면 그 사람입니까. 저희 회사에서도 여러 사람을 알아보고 그중에서 꼭 필요하다고 해서 상당한 비용을 들여서 데려왔는데, 그 사람을 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삼성에서도 전자교환기 개발을 하실 것 아닙니까. 연구소에서 먼 저개발을 하면 그만큼 짐을 덜어주는 거니까 공동으로 개발합시다. 최소장이양승택을 스카웃하려고 한 것은 전자교환기 개발 팀을 시급히 보강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전자교환기 개발의 구루(GURU)라 할수 있는 안 병성이 떠나고 나자 전기통신연구소의 전자교환기 개발 팀은 너무빈약했다.
그가맡고 있던 시분할교환기개발사업단장 자리는 경상현 선임연구부장이 겸임했고 실제로 연구개발업무를 추진할 교환연구부장에는 유완영이 임명되었으며 그 밑에 10년 가까이 그 업무를 담당해온 박항구.여재흥.
강진구 등이 포진하고 있었으나, 240억원의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해 나가기에는 너무 빈약한 팀이었다. 따라서 마땅한 책임자가 없을까 하고 고심하 던중에 떠오른 사람이 양승택이었다.
전자기술연구소장을 겸임하고 있던 최순달은 자주 구미를 오르내렸는데, 어느 날 상경길의 기찻간에서 양승택을 만났다. 그런데 삼성그룹 산하의 한국전자통신 주 에서 기술담당상무로 근무하고 있는 염승택이 뜻밖에도 연구 소에서 같이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삼성그룹의 상무이사면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는데, 연구소 같은 데로 올 려고 그럽니까?" "젊은 사람이 돈 보고 일합니까. 일이 좋아서 하는 거죠."그 말에 감동을 받았던 최순달은 언젠가는 그와 함께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는 데, 마침 그 때가 찾아왔던 것이다. 게다가 비록 아날로그 교환기이긴 해도 한국전자 통신(주)에서 2년 동안 전자교환기를 생산한 경험이 있는 양승택이 최적의 책임자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승택은 처음부터 교환기 전문가는 아니었다. 미국 버지니아공대를거쳐 벨연구소에서 11년 근무하는 동안 그는 주로 해저케이블이나 광통신 등전송분야의 연구개발에 종사했을 뿐 전자교환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 던중 재외과학자 유치라는 깃발을 든 한국통신기술연구소의 정만영 소장과 한국전자통신(주)의 이만영 사장이 동시에 나타나 귀국을 종용했는데, 그는연구소 대신 전자교환기 생산회사를 택했다. 버지니아공대 시절의 은사인 이 만영 사장을 따른 것이 아니라 연구소 생활은 충분히 했기 때문에 생산회사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 후 한국전자통신(주)에서 기술상무로서 전자교환기 의조립생산을 책임맡다 그 회사가 삼성그룹으로 넘어가면서 휩쓸려 넘어갔는데 거기에서는 M10CN은 물론 시분할전자교환기인 S1240의 도입 프로젝트와 전화기 개발사업 등으로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삼성에서 일부러 돈을 들여 스카웃한 사람은 아니었다.
체신부차관이 요구하자 삼성과 같은 재벌회사도 별 도리가 없었던 듯 이건 희부회장이 그를 불렀다.
"정부에서 당신을 필요로 한다니까 할 수 없이 보내는데, 장기출장을 간 셈치고 가 있다가 그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오도록 하시오."1981년 10월 양 승택은 삼성그룹에서 전기통신연구소로 돌아올 기약도 없는 장기출장을 떠나시분할교환기개발단장 자리를 맡았다. 안병성이 물러난 후그 자리는 경상현 선임연구부장이 겸임하고 있었는데, 아직은 240억원의 프로젝트가 확정되지 않아 인원을 보강하는 정도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부임할 때에는 26명의 연구팀이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시분할전자교환기 개발계획에 대한 최고 결정권자인 체신 부장관 최광수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전자교환기에 대해 문외한인 그로서는 주위의 의견을 들어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데, 주위에는 찬성하는사람이 별로 없었다. 체신부 간부 중 오명 차관의 적극적인 개발론에 동조 하는 사람은 배호원 기획관리실장과 김영도 기획예산담당관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술에 대해 모르기로는 그들 역시 자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기술 직가운데는 김로철 등 몇몇 과장급이 찬성했으나 그렇게 비중있는 의견은 아니었다. 산업계의 의견도 극히 부정적이었다. 이제 겨우 외국의 아날로그 전자교환 기를 들여와 조립하고 있는 우리나라 기술 수준으로 디지털 전자교환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심은 다른데 있었다. 기존의 기계식교환기의 독점생산으로 누리던 특혜를 잃은 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의 전자교환기를 도입하여 이제 막 재미를 보기 시작하려는데 또다시 얼마나 많은 비용이 소요 될지도 모르는 국산 전자교환 기를 개발하자고 나서니 반가울 리 없었다. 또한 국산전자교환기가 개발되면 원가계산이 뻔해 적정률 이상의 마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교환기 생산업체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개발이 제대로 안될 것이라는 기대하에 체신부와의 정면 대결은 가급적피했다. 국산 전자교환기의 개발을 싫어하는 것은 국내 업체만이 아니었다. 외국의 업체들도 비상한 관심을 표명하며 나름대로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다. 우리나라에 전자교환기를 수출하고 있는 AT&T나 ITT는 물론 다른 회사의 간부들이 내한할 때마다 체신부 간부나 요로를 찾아다니며, 전자교환기 개발이 얼마나 힘든 프로젝트인 줄 아느냐, 그것을 개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금과 인력 과 시간을 투입한 줄 아느냐며 은근히 겁을 주곤 했다. 한번은 노던 텔리컴 NT 의 사장이 남산의 전기통신연구소로 최순달 소장을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노던 텔리컴은 그 무렵 우리나라에 농어촌용 전자교환기 DMS 10을 팔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캐나다의 통신회사였다.
"당신이 전자교환기를 개발한다면서요?" "그렇소." "전자교환기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기계인 줄 압니까?""잘 모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과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개발한 줄압니까?" "잘 모릅니다." "잘 모르면서 어떻게 개발하려고 합니까?" "우리는 당신네들처럼 벤츠 같은 고급 교환기를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포니정도로 통화만 되는 교환기를 만드는 게 일차적인 목표죠. 그런 다음에 앞으로 좋은 것을 만들 것으로 기대하고 지금 시작하려고 합니다. 개발하다가 안되면 당신네들처럼 경험있는 회사에 가서 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할 겁니다. "기술을 전수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소?" "그렇다면 당신네 엔지니어들을 매수하겠소?" "매수가 안될 때는 어떻게 하겠소?" "당신네 회사 가까이 있는 호텔에 머물면서 당신네 엔지니어들에게 술을사주겠다고유인해서 내 방으로 데리고 가 기술을 안가르쳐 주면 권총으로 쏘겠다고 협박을 하겠소. "그런 각오가 되어 있다면 성공할 수 있겠소."뼈있는 농담 속에 감춰진 진심을 전달받은 케나다인 사장은 두말없이 떠나 버렸다.
전자교환기의 개발 프로젝트는 비단 체신부 주변에서만 물의를 일으킨 것이아니었다. 국회에서도 그 개발 가능성과 개발비 규모를 가지고 논란을 일으켰다. 어느날 황인성 국회 교체분과위원장이 최순달 소장을 불러 따졌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안된다고 하는데, 당신은 무슨 배짱으로 할 수 있다고합니까? "벤츠가 좋은 차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포니에 비하면 벤츠는 확실 히좋은차죠. 외국 사람이 우리에게 팔려고 하는 교환기종은 자동차에 비유하 면벤츠 같은 겁 니다. 오늘날 우리 농어촌에서 전화 한번 걸려면 이장집에뛰어가 신청해 놓고 몇시간을 기다려야 하며, 때로는 통행금지시간에 전화가 걸려와도 그것을 받으러 뛰어가는 상황인데, 벤츠 같은 좋은 교환기가 왜 필요합니까. 자동차로 얘기하면 포니 같은, 말이 통하는 교환기로 충분한 것아닙니까. 그처럼 말이 통하는 교환기로 시작해서 기술이 축적되면 더욱 좋은 교환기를 개발하는 것이 기술의 발전 순서이기 때문에 반드시 개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찬반의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에 최고 책임자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1981년말에 240억원의 전자교환기 개발 프로젝트가 담긴 제5차 5개년 계획이 확정됐는데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널 만큼 신중한 성격의 소우자인 최광수 장관은 최종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그 무렵은한국전기통신공사의 발족을 코앞에 둔 너무 바쁜 시점이어서 그 문제에만 매달릴 수도 없었다.
한국통신이 발족한 직후인 1982년 3월 최장관은 전자교환기 개발문제에 대 해최종 결론을 내리기로 하고, 참모들을 거느리고 금성.삼성.OPC.대한통신등4개의 교환기 생산업체를 순방했다. 그 때 동행한 참도들은 체신부의 오명 차관과 이해욱 통신정책국장, 한국통신의 경상현 계획국장, 전기통신연구소 의 최순달소장, 염승택 선임연구부장, 유완영교환연구부장, 상공부의 신국환전저전기공업국장 과기처의 이원웅 전자기술연구조정관 등이 었다. 전자교환기 개발 가능성에 대해 한 마디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망라되었던 것이다. 최장관은 그들을 이끌고 각 회사의 교환기생산 현장을 시찰하는 한편, 각회사의 책임자로부터 교환기 개발 현황에 대해 자세한 브리핑을 받았다.
참모들과 함께 인근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최장관은 참석자 개개인에게 정발 시분할전자교환기를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대부분의참석자들이 긍정적으로 대답하자, "그렇다면 시분할전자교환기 개발계획을 확정짓는다."고 선언한 다음, 전자통신연구소 간부들에게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시분할전자교환기를 개발해 내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여 체신부에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저희 연구소 연구원 일동은 최첨단기술인 시분할전자교환기의 개발을 위 해최선을 다할 것이며, 만약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것을 서약합니다." 연구소는 이와 같은 서약서를 작성하여 소장과 선임연구부장은 물론 관련부서의 실장들까지 연명으로 사인한 다음 그것을 체신부에 체줄하는 하편, 그사본을 연구원들에게 회람시킴으로써 연구개발 의지를 북돋웠다. 뒷날 한국통신의 TDX사업단장으로 임명되어 TDX개발에 큰 공을 세운 서정욱이 그 서약서를 보고 "진짜 대단한 혈서를 썼구먼!"하고 감탄했는데, 그 후 서약서를 "TDX 혈서"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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