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부품산업의 발자취 (170);저항기

한국아르오오므(주)가 일본 자본 및 기술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 한주화학의 전신인 신영전자는 성미전자와 마찬가지로 국내자본으로 설립됐다.

신영전자는 한국아르오오므(주)설립 이듬해인 73년 11월 당시 한국전력 지점 장으로 근무했던 조재두씨에 의해 설립됐다.

조재두씨는 당시 상당한 자금력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사업확대를 위해 초기자본금 3백만원을 시작으로 다음해 9월까지 3번에 걸친 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8천2백50만원까지 늘려나간다.

신영전자는 오리온전기가 구미공단으로 이전하면서 매각한 강서구 염창동 공장을 인수하면서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설립초기에는 일제 다이오드 등을 반제품으로 들여와 가공판매했을뿐저항기는 생산하지 않았었다.

신영전자가 저항부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업다각화의 필요성 때문이며 신 영전자 설립 다음해인 74년 8월15일에 벌어진 8.15 대통령저격미수사건、 즉 육영수여사피격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사건은 사실 싸니전기공업 이후 본격화됐던 한일전자업체간 협력관계구축 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육영수여사 피격사망이후 "일본은 법적 도의적 책임이 없다"는 일본당국자의 발언은 국민들의 분노를 사 곳곳에서 반일데모가 벌어졌고 분노한 시민들은 주한일본대사관에 몰려가 일장기를 떼어내기도 했다.

문세광사건은 한때 한일관계를 국교단절위기로까지 치닫게 했는데 이 한일관계 위기는 다음달 19일 시이나자민당부총재가 다나카수상의 친서를 휴대하고 박대통령을 방문、 애도와 유감의 뜻을 표명하면서 다시 정상화된다.

그러나 이 사건이 경제 관계、 특히 한일전자업체간 협력관계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한일업체간 무역관계가 사실상 중단되었음은 물론이다.

국내에 합작 또는 기술제휴관계로 설립됐던 각업체들이 일본식 이름을 한국 이름으로 개명한 것도 이즈음이다.

정부관계자들 또는 시민의 반강요(?)에 따른 것이다.

저격사건발생후한달여동안 한일경제관계 특히 무역관계가 단절되자 신영전 자의 다이오드의 반제품생산은 중단됐고 공장은 놀리는 수밖에 없었다. 사업 시작 1년만에 문을 닫게 될 지도 모를 위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자 조사장은 곧 바로 저항기생산을 추진한다.

설립자본금을8천2백50만원으로 늘렸던 조재두씨는 75년 아시아 개발은행(AD B) 차관자금을 통해 저항기설비를 도입한다.

일도쿄웰즈로부터 코팅기 2대와 캐핑기.소팅기.커팅기 등 각종설비를 도입해 반자동라인을 구축、 월 1천만개상당의 저항기를 생산한다.

신영전자는 저항기사업으로 괜찮은 수익을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물건이 없어 못팔던 시절이라 수익성도 의외로 좋았다.

저항기사업에서 재미를 본 조사장은 곧바로 전자시계 등 세트산업에 손을 대기 위해 77년경 신향전자를 설립하고 사업다각화를 시작했으나 이것이 화근 이 돼 신영전자창립자인 조재두씨는 78년 급기야 회사를 매각하게 된다.

무리한 사업확대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신영전자는 당시 서린호텔 사장 아들로서 재력과 미MIT공과대학졸업이라는 간판을 가진 이종성씨에 의해 인수돼 "서린전자"로 이름을 바꾸면서 저항기사업의 맥을 잇게 된다.

신영전자와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삼양전자부품기기와 아비코는 저항기사업에 한번 맛을 들이면 발을 빼기 어렵다"는 업체 관계자들의 말을 실감나게하는 사례들이다.

삼양전자부품기기는 성요사 초대사장인 문태준씨가 설립했고 아비코는 전주 의 위트산업대표였던 신해근씨가 새롭게 시작한 회사다.

성요사 초대사장에서 물러났던 문태준사장은 자기사업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곧바로 71년 국회의장을 지냈던 민관식씨의 뚝섬소재 개인사무실 지하실 을 빌려 삼양전자부품기기를 설립、 저항기생산에 나선다. 삼양전자부품은국내업체중 메이저급 업체로 성장하나 이후 배모씨에 인계된 뒤 80년을 전후로 저항기 생산을 중단한다.

위트산업을 설립했다가 실패한바 있는 신해근씨도 저항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비코를 설립하게 된다. <조시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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