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경쟁의 승부는 기술개발도 중요하지만, 적용속도에 달려있다
최근 글로벌 인공지능(AI) 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은 단순한 기술개발 경쟁을 넘어 '속도전(speed race)'으로 전개되고 있다. 오픈AI, 구글, 앤트로픽, 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짧은 주기로 새로운 AI 모델을 출시하며 추론(reasoning), 코딩, 멀티모달, 에이전트 등 AI의 능력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의 배경에는 막대한 컴퓨팅 자원의 투입이 있다. 미국의 비영리 연구기관인 에포크 AI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최첨단 거대언어모델(LLM)의 학습에 투입되는 컴퓨팅 규모는 연평균 약 5배씩 증가했으며, 이는 약 5.2개월마다 두 배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설명해 온 무어의 법칙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AI 시대에는 컴퓨팅 자원과 모델 규모, 알고리즘의 발전이 서로 결합하면서 기술혁신의 주기가 더욱 압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속도전의 의미는 단순히 더 좋은 AI 모델이 더 빠르게 등장한다는 데 있지 않다. 진정한 경쟁력은 기술개발과 현실 적용 사이의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는가에 있다. 누가 더 빠르게 AI를 개발하는가뿐 아니라, 누가 이를 산업과 행정, 도시와 일상생활에 먼저 적용하고 경제적·사회적 가치로 전환하는가가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AI 경쟁의 초점은 '누가 더 좋은 기술을 만드는가'에서 '누가 더 빠르게 기술을 현실의 가치로 전환하는가'로 이동하고 있다.
문제는 AI 기술의 발전 속도와 현실 세계의 변화 속도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AI 모델은 수개월 단위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지만, 인프라를 구축하고 데이터를 표준화하며 프로세스를 바꾸고 새로운 서비스를 제도화하는 데에는 수년이 걸린다. 기술은 빠르게 진화하는데 조직과 제도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되면서 기술발전과 현실적용 사이에 '시간적 지연(Time Lag)'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피지컬 AI와 에이전틱 AI가 실제 도시와 물리적 환경으로 확장되면서 이러한 간극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이를 AI시대의 새로운 '기술과 현실의 간극(Implementation Gap)'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간극은 두 가지 상반된 요구를 동시에 만들어내는데 한편에서는 빠르게 발전하는 AI를 산업과 도시 현장에 신속하게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충분히 검증 되지 않은 AI를 시민의 삶과 안전에 직접 적용하는 데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혁신과 실증을 넘어, 도시혁신의 선순환 구조로
기존 스마트도시 정책에서는 다양한 신기술의 혁신과 실증을 위해 혁신지구와 실증지구가 서로 다른 목적 아래 발전해 왔다. 혁신지구가 기업·대학·연구기관의 집적을 통해 산업과 연구의 혁신을 촉진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실증지구는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실제 도시환경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검증하는데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연세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IfM Engage가 공동 발간한 '스마트시티 인덱스 보고서 2026'에 따르면, 조사 대상 주요 도시의 실증·혁신지구는 2024년 대비 약 4.3배 확대됐다. 특히 조사 대상 50개 도시 가운데 실증과 혁신 기능을 결합한 통합형 지구의 운영 비중은 2024년 16%에서 2026년 22%로 증가했다. 이는 단순히 실증과 혁신의 공간이 양적으로 증가했다는 의미를 넘어, 도시의 혁신체계가 '혁신과 실증의 분리'에서 '혁신과 실증의 결합'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증지구의 플랫폼화를 통한 공간의 전환
AI 기술은 발전 주기가 매우 짧고 실제 환경에서의 데이터와 피드백을 통해 빠르게 고도화되기 때문에, 기술개발과 실증을 별개의 단계로 구분하는 기존 방식만으로는 기술혁신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이와 같은 변화를 선도하는 도시들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들이 나타났다.
첫째로 더 이상 실증지구는 완성된 기술을 시험하는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업·연구기관·정부·시민이 함께 기술을 개발하고 실험하며 개선하는'도시혁신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AI 정책은 실증단지를 얼마나 많이 조성했는가보다 혁신-실증-시민참여-사업화-확산이 하나의 혁신 생태계로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히 AI 실증의 핵심은 일회적인 기술 검증이 아니라 '실증→데이터·시민 피드백→기술·서비스 개선→재실증→사업화·확산→새로운 데이터와 피드백'으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순환구조를 구축하는 데 있다. 실증 과정에서 생성된 데이터와 현장의 경험이 다시 기술과 서비스의 개선으로 연결되고, 개선된 서비스가 실제 도시에서 다시 검증되면서 새로운 데이터와 학습이 축적되는 구조다. 이러한 선순환이 반복될 때 실증은 일회성 사업을 넘어 도시가 스스로 학습하고 혁신하는 지속가능한 도시혁신 생태계로 발전할 수 있다.
◇리빙랩의 매개체 역할 확대와 융합을 통한 참여의 전환
두 번째 변화는 사용자의 경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술과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개선 시키는 리빙랩의 역할 확대다. 50개 도시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리빙랩 연계형 실증지구는 2024년 대비 약 7.2배 증가했다. 리빙랩 연계형 실증지구가 전체의 47.9%를 차지했고, 실증과 혁신 기능을 결합한 통합형 실증·혁신지구도 35.6%에 달했다. 두 유형을 합하면 약 84%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리빙랩이 단순한 시민참여와 의견수렴의 공간을 넘어 실증과 혁신을 연결하는 통합형 플랫폼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리빙랩은 기술을 일회적으로 실험하는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기업·연구기관·공공기관이 실제 도시환경에서 기술과 서비스를 함께 실험하고 개선하는 지속적인 도시혁신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시민은 더 이상 데이터를 제공하거나 서비스의 수동적인 이용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 사용 경험과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기술과 서비스의 개선 과정에 참여하는 공동 혁신자로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결국 리빙랩은 혁신-실증-시민 피드백-개선-확산을 연결하는 핵심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AI 시대에는 기술의 성능뿐 아니라 실제 시민의 경험과 사회적 수용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리빙랩을 통한 지속적인 현장 학습과 피드백은 AI 실증의 핵심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실증에서 사업화와 확산 관점의 성과의 전환
세 번째 변화는 실증의 목적 자체가 단순한 기술 검증에서 사업화와 확산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실증사업은 새로운 기술이 실제 환경에서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기술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도시혁신이 완성되지 않는다. 사업이 종료된 이후에도 서비스가 지속적으로 운영되고, 다른 지역과 도시로 확산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모든 기술을 대규모로 도입한 뒤 문제가 발생하면 수정하는 방식은 AI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 작은 규모에서 빠르게 실험하고, 데이터를 통해 검증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수정하는'작은 실증-빠른 학습-단계적 확대'방식이 필요하다. 시민의 안전과 권리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AI는 제한된 환경에서 먼저 실증하고, 위험 수준과 성과에 따라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따라서 실증지구는 실증-데이터 축적-서비스 개선-사업화-확산이 반복되는 순환형 구조를 갖춰야 한다. 실증사업을 기획하는 초기 단계부터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 공공조달, 투자와 사업화, 다른 도시로의 확산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실증을'끝나는 사업'이 아니라'확산을 시작하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규제 샌드박스를 실증과 제도화의 플랫폼 전환
마지막으로는 지금까지 규제샌드박스는 신기술과 새로운 서비스가 기존 규제에 가로막히지 않고 일정 기간 시장에서 실험할 수 있도록 규제를 한시적으로 유예하거나 특례를 부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단순한 규제 완화나 유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가 실제 도시환경에 적용되면서 개인정보, 안전, 책임, 알고리즘의 신뢰성 등 새로운 규제 이슈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규제샌드박스는'규제 유예'에서'실증과 제도화의 플랫폼'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실증 단계부터 규제기관이 참여해 기술의 안전성과 효과를 검증하고, 실증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성과를 바탕으로 기존 규제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기준과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AI 실증에서는 일회적인 규제 특례보다 위험수준에 따른 단계적 규제, 지속적인 모니터링, 성과 기반의 규제 전환이 중요하다.
규제샌드박스의 성과 역시 얼마나 많은 기업과 기술에 특례를 부여했는가가 아니라, 실증을 통해 무엇을 학습했고 그 결과가 어떻게 제도와 규제의 변화로 이어졌는가로 평가해야 한다. 규제샌드박스는 규제를 피하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과 제도를 함께 실험하고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는'규제혁신의 실증 플랫폼'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한국의 AI실증, 기술 PoC에서 문제해결형 실증으로
우리나라는 이미 스마트시티, 규제자유특구, 테스트베드, 실증도시 등 다양한 형태로 새로운 기술을 실제 환경에서 시험해 왔다. AI 분야에서도 자율주행, 스마트교통, 재난안전, 에너지, 돌봄 등 다양한 실증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실증사업에서는 한 가지 구조적 문제가 반복되어 왔다. 사업기간에는 기술과 서비스가 작동하지만 사업이 종료되면 운영이 중단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 이유는 실증의 목표가'기술이 작동하는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AI 모델의 정확도와 시스템의 안정성은 중요한 지표지만 더 나아가 그 기술이 실제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가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시민 또는 사용자 사용하지 않거나 행정이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없고 기업이 사업모델을 만들지 못한다면 실증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이를 위해서는 실증의 성과평가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단순히 AI 모델의 정확도나 참여 기업 수, 실증 건수와 같은 투입·산출지표에 머무르지 않고 문제 해결 효과, 시민 체감도, 지속가능성, 사업화, 확산 가능성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 실증사업이 종료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운영되는지, 다른 지역에서 재현될 수 있는지, 민간투자와 시장으로 연결되는지도 중요한 성과지표가 되어야 한다.
◇빠르게 실증하고, 신중하게 검증하고, 과감하게 확산하라
AI 시대의 실증은 결국 속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문제다. 기술개발과 실험은 빠르게 해야 하지만, 시민의 안전과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신중하게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검증된 기술과 서비스는 과감하게 확산해야 한다. 빠른 실험, 신중한 검증, 과감한 확산이라는 세 가지 원칙이 새로운 AI 실증체계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실증사업의 운영방식을 바꾸자는 제안이 아니다. AI 시대에는 기술혁신의 속도 자체가 국가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기 때문에, 기술개발-실증-제도화-사업화-확산을 연결하는 국가 차원의 혁신 실행체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실증지구는 도시혁신 플랫폼으로, 리빙랩은 시민과 기술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규제샌드박스는 실증 결과를 제도화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해야 한다.
결국 AI 실증의 핵심은 '속도를 높이는 것'과 '속도를 늦추는 것'을 동시에 잘하는 데 있다. 기술개발과 실험은 빠르게, 검증과 사회적 합의는 신중하게, 성공한 모델의 확산은 과감하게 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속도전이 아니라 빠르게 학습하고, 신중하게 판단하며, 검증된 혁신은 빠르게 확산하는 새로운 실증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AI가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속도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AI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AI를 얼마나 잘 만드는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AI를 언제 빠르게 적용하고, 언제 멈춰 검증하며, 언제 과감하게 확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능력이 새로운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제 AI 실증은 기술을 시험하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기술과 도시와 제도를 함께 혁신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정훈 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 jhoonlee@yonsei.ac.kr
〈필자〉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AIoT 서비스 융합트랙)이자 DT기술경영 센터장으로 현재 대통령직속 국가인공지능위원회 지역특위 분과위원과 국가데이터 정책위원회 생산·공유 분과위원회에서 실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시 명예시장·스마트도시위원회 위원장·위원, 국가 스마트도시위원회 위원, 한국 IT서비스학회 및 기술경영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영국 캠브리지대 IfM Engage와 2년 주기로 발간하는 스마트시티인덱스 보고서의 저자이며, 현재 UN HABITAT에서 주도하고 있는 '사람중심의 스마트도시 구현을 위한 국제가이드라인'의 전문가 그룹 한국대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