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촬영장 지우고, 없던 제품 넣고…“AI로 딸깍? 진짜 승부는 그 다음”

와이어에 매달린 한 남성이 도심 한복판에 서 있다. 화면 양옆에는 대형 촬영 장비와 조명, 스태프들이 빼곡하다. 영상이 몇 초 흐르자 촬영 장비와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빈자리는 건물과 도로로 자연스럽게 채워지고 마지막에는 배우만 남는다.

덱스터스튜디오가 보여준 'AI 인페인팅' 적용 사례다. 영상에서 없애고 싶은 대상을 AI가 찾아 지우고 사라진 부분을 주변 배경에 맞춰 복원한다. 와이어나 촬영 장비, 사람 등을 프레임마다 직접 지우던 반복 작업 상당 부분을 AI가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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덱스터스튜디오 'AI 인페이팅' 사례 영상.

없던 물체를 넣는 것도 가능하다. CJ ENM의 가상 간접광고(VPPL)는 촬영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제품을 영상에 합성한다. 드라마 '취사병 전설이 되다'에서는 창고 선반에 놓인 일반 식재료가 후반 작업을 거쳐 PPL 고추장 제품으로 바뀌었다. 박지훈 배우가 손에 든 고추장도 PPL 제품으로 교체됐다. 카메라 각도와 손의 위치, 기존 장면의 빛과 색감에 맞춰 자연스럽게 합성됐다.

과거 드라마 PPL은 촬영 전에 결정해야 했지만 VPPL을 활용하면 촬영을 마친 뒤 실제 장면을 확인하고 제품을 넣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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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ENM 가상 간접광고(VPPL)가 적용된 '취사병 전설이 되다' 속 장면.
촬영장 지우고, 없던 제품 넣고…AI는 제작공정 속으로

콘텐츠 산업에서 AI는 업무 전반에 녹아들고 있다. 완성된 영상에서 물체를 없애거나 넣고, 저화질 영상을 선명하게 만들고, 배우의 얼굴을 젊게 바꾸는 등 기존 제작 공정 곳곳에 AI가 활용된다.

덱스터스튜디오 작업실에서는 수십 대의 모니터마다 서로 다른 제작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아티스트들이 3D 공간과 실사 영상을 오가며 작업하는 풍경 자체는 기존 VFX 제작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그 안에서 사용되는 도구다.

송재원 덱스터스튜디오 R&D 연구소장은 “AI라고 하면 영상이나 이미지를 생성해서 쓰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하지만 VFX 회사에서는 회사 전반에 AI가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작업 스케줄을 만들고 업무를 분배하는 것부터 내부 소프트웨어 개발, 3D 모델링과 애니메이션 제작까지 활용 범위가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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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덱스터스튜디오의 VFX 아티스트들 모습.

현재 덱스터스튜디오가 작업하는 전체 샷 가운데 AI가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는 비중은 약 20~30%다. 영상의 20~30%를 통째로 AI가 만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와이어를 지우거나 일부 소스를 생성하는 등 제작 과정 중 한 단계에 AI가 들어가는 경우까지 포함한다.

저해상도 영상을 선명하게 복원하는 AI 업스케일링, 여러 인물의 움직임을 동시에 3D 공간으로 옮기는 AI 매치메이션, 배우를 젊거나 늙게 만드는 디에이징·에이징, 페이스 스왑 등에도 AI를 적용한다.

광고에서도 AI 활용 범위가 넓어졌다. 해외 로케이션이나 대규모 3D 작업이 필요한 장면을 AI로 구현하고, 광고주에게 스토리보드 대신 AI로 제작한 시안 영상을 보여준다. 추영주 CJ ENM 360&AI솔루션 팀장은 “AI를 통해 기존 PPL과 촬영 기반 광고가 가진 시간적·비용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며 “광고주가 '이렇게 새로운 것까지 가능하구나'를 느끼게 하는 게 차별점”이라고 말했다.

AI는 광고가 들어갈 위치까지 찾는다. CJ ENM의 '맥락 타깃팅'은 콘텐츠 속 객체·행동·배경을 분석해 광고와 연관성이 높은 장면을 찾아 광고를 노출하는 방식이다. 이재헌 CJ ENM 광고상품팀 팀장은 “기존 방송광고가 시청률 중심이었다면 맥락 타깃팅은 콘텐츠와 광고가 얼마나 개연성 있게 붙어 있는지까지 확장한 솔루션”이라고 설명했다. 향후에는 '감정'까지 AI 분석 대상에 포함할 계획이다.

광고주의 반응도 변했다. 추 팀장은 “초기에는 AI 광고의 완성도에 대한 우려가 가장 많았다”며 “실제 집행 사례나 AI 시안 영상의 품질을 확인하면서 현재는 완성도에 대한 우려가 거의 없어졌다”고 말했다. AI로 제작된 광고를 보고 먼저 문의하거나 한 편을 만든 뒤 추가 제작에 나서는 사례도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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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헌 광고상품팀 팀장과 추영주 광고 360 & AI솔루션 팀장김민수기자 mskim@etnews.com
“얼마나 쓰나보다 어떻게 붙이나”…AI 경쟁은 ‘워크플로우’로

AI가 보편화될수록 역설적으로 경쟁의 초점은 AI 모델 자체보다는 업무 방식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달렸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송 소장은 “어떤 워크플로우를 잘 만드느냐가 회사의 경쟁력이 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자연재해 장면을 만들 때와 배우의 얼굴을 바꿀 때 필요한 AI 기술과 처리 과정이 서로 다른 만큼 작업 목적별로 AI와 기존 VFX를 결합하는 최적의 제작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덱스터스튜디오는 제작을 맡는 'AI VFX팀'과 기술을 연구하는 'AI R&D팀'을 따로 운영한다. 제작팀이 원하는 물리효과를 구현하지 못하면 R&D팀이 해결할 워크플로우를 개발해 다시 현장에 적용한다.

송 소장은 “열 배 빨리 만들어지는 장면도 있지만 어떤 장면은 오히려 시간이 더 든다”며 “감독이 원하는 정확한 장면을 만들려면 AI만 써서는 안 되고 기존 VFX 파이프라인과 함께 적용해야 더 잘 나온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AI는 기존 제작 기술을 대체하기보다 선택지를 늘리는 도구에 가깝다. 기존 VFX가 효율적인 장면은 기존 방식으로, AI가 강한 작업은 AI로, 필요하면 두 방식을 결합하는 식이다.

‘마지막 1%’는 여전히 사람 몫…기술·데이터·인재가 격차 만든다

CJ ENM의 VPPL에서도 AI가 합성의 주요 과정을 맡지만 최종 판단은 사람이 한다. 제품 위치와 형태가 프레임마다 흔들리지 않는지, 조명과 그림자가 자연스러운지, 브랜드 가이드라인에 맞는지를 사람이 확인한다.

추 팀장은 “AI 솔루션이 합성의 기술적인 주요 과정을 수행하고 사람은 예외적인 부분을 체크하면서 최종 품질을 확인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덱스터스튜디오도 마찬가지다. AI가 반복 작업을 줄이더라도 감독의 연출 의도나 세밀한 표현까지 자동으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송 소장은 “'영상 제작은 AI로 딸깍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이 있지만 하이엔드 영상을 완성하려면 여전히 많은 아티스트가 노력하고 열정을 들여 작업한다”고 말했다. AI가 반복 작업을 덜어준 시간은 오히려 사람이 더 어려운 작업에 집중하기 위한 자원이 된다.

기업의 차별화된 경쟁력도 여기에서 나온다. 덱스터스튜디오는 2012년 이후 자체 개발한 약 80개 VFX 소프트웨어와 축적된 데이터·플러그인을 AI와 결합하고 있다. CJ ENM도 특정 모델 하나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내 AI 테크랩과 AI 스튜디오랩 등이 구축한 제작 솔루션을 중심으로 외부 AI 기술을 목적에 따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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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원 덱스터스튜디오 송재원 R&D 연구소장의 업무 모습.

인재의 역할도 달라진다. 덱스터스튜디오는 고품질 이미지와 영상을 만드는 'AI 아티스트'와 최신 모델 연구·파인튜닝을 맡는 'AI 엔지니어'를 함께 운영한다.

AI에 창작을 맞추는 것은 경계한다. 송 소장은 “AI가 잘 나오니까 비용을 줄이기 위해 기획을 바꾸다 보면 'AI 티'가 많이 나는 콘텐츠가 나올 수 있다”며 “창작자의 기획 의도와 창작 의도를 살려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는 노력도 계속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팀장도 “AI 시대의 핵심은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활용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얼마나 확장하느냐에 있다”고 말했다.


최다현 기자 da2109@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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