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은 이제 단순한 소프트웨어(SW)를 넘어 자동차와 로봇, 의료기기, 공장은 물론 국가 통신망 및 전력설비의 운영과 제어에 활용되는 핵심 기술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수많은 센서와 통신장치, 전자제어장치가 연결돼 동작한다. AI의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를 뒷받침하는 센서와 전자·통신 시스템이 전자파 방해로 오동작하면 안전과 서비스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기 환경은 모든 전기·전자 기기의 동작에 영향을 미친다. 무선통신 신호뿐만 아니라 고속 디지털 신호와 전원 스위칭, 정전기와 낙뢰 등 다양한 전자기 현상이 기기의 동작을 방해할 수 있다. 기기가 촘촘하게 연결되고 서로 다른 기술이 융합될수록 예상하지 못한 상호작용과 연쇄 고장의 가능성도 커진다.
이를 관리하기 위한 기술·제도적 기반이 전자파적합성(EMC)이다. EMC는 장비가 주변에 허용할 수 없는 전자파 방해를 유발하지 않고, 예상되는 전자기 환경에서도 요구되는 성능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정해진 시험조건에서 기준을 충족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운용 중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에 대응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AI 기반 자율시스템과 핵심 인프라에서는 작은 센서 오류나 순간적인 통신 장애만으로도 잘못된 판단과 기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인명 안전과 직결되거나 핵심 서비스의 중단을 초래할 수 있는 장비와 시스템이라면, 전자파 방출을 제한하고 필요한 내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상하지 못한 방해가 발생해도 필수 기능을 유지하고 피해를 제한하며, 허용 가능한 운용 상태를 유지하거나 신속히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전자기 복원력'이라고 한다.
전기·전자 장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EMC가 기본 보호체계라면, 전자기 복원력은 고장 결과가 중대한 안전 관련 장비와 핵심 시스템에 추가로 요구되는 시스템 차원의 안전 역량이다. 이러한 장비와 시스템에는 'EMC 기준을 충족했는가'를 넘어 '기준 시험이 포괄하지 못한 전자파 방해가 발생해도 필수 기능을 유지하거나 필요하면 안전한 상태로 전환한 뒤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전자기 복원력은 전자파 방해에 대한 내성뿐만 아니라 이상 탐지와 고장 격리, 예비 기능으로의 전환과 기능 복구까지 포괄한다.
일례로 자율주행차의 센서가 전자파 방해로 오류를 일으키면 서로 다른 원리의 센서 정보와 자체 진단정보를 교차 검증해 이상 여부를 식별하고, 필요하면 제한 운행이나 안전 정지로 전환해야 한다. 스마트공장의 안전 제어시스템과 핵심 통신망도 일부 장비의 장애가 전체 서비스 중단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고장을 격리하고 운용 방식을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제품 출하 전 한 번의 시험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실제 전자기 환경과 고장 결과를 분석해 위험 수준에 적합한 보호대책을 설계하고, 시험과 시뮬레이션으로 이를 검증해야 한다. 운용 단계에서는 장비와 시스템의 상태를 감시하고 이상 발생 시 고장을 격리하거나 운용 모드를 전환해야 한다. 장애 대응 과정에서 얻은 경험도 다시 설계와 평가, 표준에 반영하는 전 수명주기 관리가 필요하다.
관련 IEC·IEEE 국제표준은 전자기 현상으로 인한 기능안전과 수명주기 위험관리의 기본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복잡하게 연결된 AI 시스템과 핵심 인프라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 수준의 전자기 복원력 평가체계는 아직 충분히 정립되지 않았다. 앞으로는 위험 수준에 따라 요구사항을 차등화하고, EMC를 기능안전과 신뢰성, 사이버보안 등 인접 분야와 연계해야 한다.
자율주행 시스템과 스마트공장의 안전 제어시스템, 지능형 통신·전력 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는 지금, 전자기 복원력은 안전 확보를 넘어 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고위험 분야에는 위험 수준에 따라 차등화된 EMC 요구사항을 적용하고, 제품 단위 형식시험 중심의 평가체계를 시스템 설계 검토와 현장 검증, 운용 단계의 상태감시까지 연계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AI 시대의 안전은 모든 장애를 사전에 제거하는 것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전자기 위험을 예측하고 견디며, 이상을 탐지·격리하고, 필수 기능을 유지·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전자기 복원력은 신뢰할 수 있는 AI 시스템과 핵심 인프라를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안전망이다.
권종화 ETRI 책임연구원·한국전자파학회 신기술사업 상임이사 hjkwon@etri.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