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사막'이 출시 83일 만에 600만장 넘게 팔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첫날 200만장이라는 숫자다. 그 날 대다수 이용자는 아직 이 세계를 충분히 겪어 보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믿고 선뜻 지갑을 열었을까. 필자는 게임만이 아니라 그 게임을 만든 사람들, 정확히는 그들이 지난 10여년간 이용자와 쌓아온 관계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견고한 신뢰는 좋은 일만으로 쌓이지 않는다. 좋기만 했던 사이는 서로를 시험해 본 적이 없어 오히려 약하다. 진짜 신뢰는 다투고 실망하고 등을 돌렸다가도,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경험에서 자란다. 고운 정과 미운 정이 동전의 양면인 이유이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서비스 회복 역설(service recovery paradox)'이라는 개념이 있다. 문제가 생긴 뒤 이를 제대로 해결해 주면 이용자의 만족도와 충성도가 오히려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실패가 신뢰를 키우지는 않는다. 방치된 불만은 관계를 끝낸다. 그러나 불만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진심으로 응대하면, 이용자에게 “이 개발사는 내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는다”는 확신을 남길 수 있다.
'검은사막'의 10여년은 그런 신호와 응답이 쌓인 세월로 보인다. 운영 방식을 두고 이용자들이 크게 반발한 적도, 등을 돌린 이들이 쏟아진 적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 요구들이 방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긋남마다 회복이 뒤따랐고, 그 반복이 오늘의 신뢰를 만들었다.
그 세월은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북미와 유럽, 일본과 대만, 동남아와 중동의 이용자들이 같은 세계에 있었다. 무엇에 기뻐하고 어디서 실망하는지는 문화마다 다르다. 당연하게도 문화적 차이를 다루는 법은 이론만으로 익혀지지 않는다. 어긋나 보고 수습해 본 시간이 쌓일수록 암묵지로 축적된다.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노하우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열쇠는 심리적 소유감이다. 친구가 잘되면 내 일처럼 뿌듯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면 내가 당한 듯 발끈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검은사막 이용자들이 붉은사막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패치 하나에 수백 개의 댓글을 달고, 난이도를 두고 논쟁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안한다. 갈등의 시기에 그토록 격하게 반응했던 것도 실은 이 소유감의 이면이다. 무심한 사람은 화내지 않는다.
이 소유감은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용자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만년설 위로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사진 모드로 풍경을 찍어 올리면 그 아래 다른 이용자들이 자기 사진을 붙인다. 게임 진행에 도움도 보상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 것'이라 느끼는 세계에서는 이런 무용한 몰입이 자연스럽다. 자기 것을 가꾸는 사람에게 효율을 묻지 않는 것과 같다.
신뢰와 소유감이 오래 겹치면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된다. 사람이 언제 즐거워하고 언제 좌절하는가에 대한 이해는 매뉴얼에 담기지 않는다. 오래 지켜본 사람의 경험에 남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경험이 개발사에만 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회사가 어떤 식으로 세계를 짓고 어떤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오래된 이용자일수록 몸으로 안다.
물론 이 관계에는 위험도 따른다. 공감대가 두터운 사이일수록 그것이 흔들릴 때의 반발은 남남보다 훨씬 격렬하다. 아무 사이도 아닌 상대에게는 실망할 일조차 없지만, 오랜 관계에서 느끼는 배신감은 더 아프게 작동한다. 신뢰와 소유감과 공감대는 관계를 지탱하는 힘인 동시에, 잃었을 때 관계를 급격하게 무너뜨리는 양날의 검이라 할 것이다.
국내외 이용자들의 붉은사막에 대한 열광은 뛰어난 신작 하나가 거둔 성과로만 읽히지 않는다. 갈등을 통과하며 단련된 신뢰, 그 시간이 이용자에게 심어준 소유감, 그리고 둘이 겹쳐 자라난 공감대가 어우러져 맺은 결실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빠르게 만들 수 없고 복제되지도 않는다. 좋은 게임이 개발사 혼자 완성되지 않는 이유이고, 오래 함께한 이용자가 자기 세계처럼 아끼고 기꺼이 개입할 때 그 세계가 더 단단해지는 이치다.
이장주 이락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게임정책자율기구 이사 zzazan01@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