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외교가 총칼 없는 전쟁터에서 국가 간 영토와 주권을 지키는 정부의 전유물이었다면, 현대 외교는 경제, 문화, 스포츠를 아우르는 '소프트 파워' 각축장이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지정학적 리스크가 일상화된 '폴리코노미(Policonomy)' 시대에 기업의 민간 외교는 공식 외교가 미치지 못하는 틈새를 메우고 국가 경제 영토를 확장하는 핵심 동력으로 부상했다.
선진국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업 민간 외교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활용해 왔다. 독일 세척 장비 전문 기업 카처(Karcher)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등 세계 문화유산을 세척하는 '문화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독일 기술의 정밀함과 인류애를 전파한 것이 대표적이다. '독일제=신뢰'라는 국가 브랜드를 공고히 하는 밑거름이 됐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 역시 단순한 경제 주체를 넘어섰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이버 안보 규범을 주도하며 '디지털 외교관' 역할을 자처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증명된 스페이스X 스타링크 사례는 민간 기술력이 국가 안보와 지정학적 지형을 바꾸는 핵심 외교 자산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업 민간 외교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주도한 '이건희 컬렉션' 기증은 단순한 사회 환원을 넘어선 고도의 문화 외교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세계적 수준 미술품들이 해외 순회 전시를 통해 소개되면서, 한국은 'IT 강국'을 넘어 깊은 역사와 예술적 소양을 갖춘 '문화 강국'으로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이러한 국가 이미지 제고는 곧 한국 기업과 제품에 대한 '프리미엄'으로 연결되며, 무형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자산이 된다.
스포츠 외교 분야에서 성과도 그 격을 한층 높였다. 최근 김재열 삼성글로벌리서치 사장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것은 한국 스포츠 외교사 쾌거이자 민간 외교의 승리다. 글로벌 스포츠 거버넌스 의사결정 기구에 한국인이 진입했다는 것은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 발언권이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한다. 향후 대규모 국제 행사 유치나 스포츠 산업 글로벌 진출에 있어 강력한 네트워크 자산이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네트워크와 자금력, 문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국가 위신을 세우고 경제적 실익을 챙기는 '국가 대표'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기업인이 해외 정상들과 독대하며 비즈니스 현안을 논의하고, 문화와 스포츠를 통해 국가 품격을 높이는 모습은 일상적 풍경이 됐다.
기업 위상이 곧 국가의 위상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민간 외교 성과가 지속되고 국가 발전 선순환 구조로 안착하기 위해 정부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민간 외교관으로서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정부는 낡은 규제 족쇄를 과감히 풀어줘야 한다. 기업 발목을 잡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민간의 외교적 성과가 정부 정책과 맞물려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민관 협력 시스템'을 공고히 해야 한다.
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국익을 대변하고,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는 '원팀(One Team)' 체제가 가동될 때 비로소 진정한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 민간 외교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특히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정점에 달한 지금은, 기업과 정부가 국가 발전을 위해 함께 보조를 맞추는 지혜로운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김시소 기자 siso@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