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자료 임치(任置)제도는 2008년 대·중소기업 상생협력법에 근거가 마련돼 시행된 지 17년째이나 많은 이들에게는 생소하다. 이 제도의 기본 목적은 공급기업의 기술자료를 신뢰할 수 있는 제3자(수치인)에 맡겨 수요기업이 공급기업에 함부로 핵심 기술자료를 요구하지 않도록 하고, 공급기업의 파산·청산 등으로 제품과 서비스 공급이 어려워지는 경우 수치인이 보관 중인 기술자료를 수요기업이 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업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공급기업도 기술을 개발하고 보유한 사실을 임치된 기술자료로 입증할 수 있어 자사 기술에 대한 대외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또 기술 유출과 분쟁 발생 시 증거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상당히 유용하다.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은 수치인으로서 17년간 기술자료 임치제도를 운영하면서 누계 약 12만2000건 임치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계약 방식이 기본적으로 맡기는 주체와 재단 간 양자 계약이며 연구개발(R&D) 지원 등과 결합한 임치 의무 외에 기업의 자발적 활용 수요가 20% 정도로 낮아 계약 갱신이 없는 경우가 매년 거의 절반에 달한다. 임치기술에 대한 검증이 없고 단순 보관 수준에 머물러 기술을 임치한 기업들이 별다른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다.
1999년 설립돼 1만5000여 고객을 보유하고 있고 런던 증시에 상장된 영국의 NCC 그룹이나 에스크로 런던(EL), 네덜란드 에스크로 얼라이언스 등 유럽 민간 임치기업들은 임치할 기술을 검증한 다음 '공급기업-수치인-수요기업' 3자간 임치계약을 체결한다. 하나의 공급기업과 다수 수요기업 간 계약도 가능하다. 보관 대상도 비밀번호· 민감한 문서·브랜딩 전략 등 다양하다. 이들은 기술자료를 맡긴 공급기업을 위해 다른 수요기업을 찾아주거나 투자유치 지원, 기술거래 연계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면서 발전했다. 이 밖에도 민간 창의성을 살려 데이터 복구, 보관 보험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연간 임치 수수료가 300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를 정도로 활성화됐다.
우리나라는 임치 수수료가 연간 30만원이며 창업·벤처기업 등은 30% 감면을 받고 있다. 공적기관인 재단은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기 어렵고, 수수료 인상도 부담스럽다. 그간 운영 경험을 돌아볼 때 임치제도 혁신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첫째, 3자간 임치계약을 통한 사업 안정성, 연속성 보장이 필요하다. A항공사는 예약시스템 소프트웨어(SaaS)를 개발한 소규모 기업 B로부터 서비스를 공급받는 과정에서 EL과 3자 간 계약을 체결했다. EL은 소스코드 등을 검증한 후 예약시스템이 매일 자동으로 동기화되도록 했다. 이후 개발기업 B가 파산하자 EL이 바로 클라우드 백업 데이터를 기반으로 90일간 대체 서비스를 제공한 다음 A항공사로 이전해 예약시스템 중단을 방지될 수 있었다. 이 사례는 3자계약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둘째, 수치인의 전문성 제고와 서비스 다양화가 필요하다. 전문인력을 충원해 법률 검토, 기술검증, 기술가치 평가, 기술거래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수치인은 이러한 역할을 바탕으로 뛰어난 기술을 임치한 기업에 판로 확대, 기술거래, 투자유치 기회 등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셋째, 임치제도에 대한 인식 개선, 우수 활용사례 발굴과 홍보가 필요하다. 임치가 기술자료를 단순히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요·공급기업에 거래·판로 확대의 '시작'이라는 점이 인식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임치제도의 자발적 이용 확대, 한 차원 높은 서비스 제공, 궁극적으로는 임치 서비스의 민영화도 가능할 것이다.
김영환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 사무총장 yhk@win-wi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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