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21〉조직위, 88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 국내 개발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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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이 1983년 10월 25일 청와대에서 제64회 전국체전 유공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이런 초대형 프로젝트를 3개월 안에 개발한다고요?”

성기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시스템공학센터(SERI) 소장이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와서 면담 결과를 설명하자 직원들이 보인 첫 반응이다.

“이 일을 해내야 올림픽 전산시스템도 우리 손으로 개발할 수 있습니다.”

모두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때 김봉일 전산개발부장이 침묵을 깼다.

“소장님, 해봅시다. 체전 전산화를 성공시켜서 우리가 올림픽 전산시스템을 개발합시다. 우리가 언제 쉬운 일만 했습니까?” 분위기가 '해보자'로 급변했다.

성 소장은 1983년 7월 하순 그동안 운영하던 올림픽 기초조사팀을 인천체전 전산화팀으로 확대 개편했다. 팀장은 김봉일 부장이 맡았다. 실패하면 국내 개발은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다.

전국체전 전산시스템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기운영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 일정과 기록 등을 알려주는 정보제공 시스템이었다.

전산화팀에 참여한 연구원은 25명. 전산화팀은 인천 공설운동장 근처의 한 여관을 통째로 빌려 그곳에서 사상 첫 체전 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처는 특정연구비에서 1억원을 체전 시스템 개발비로 배정했다.

당시 관계자의 말. “당시 1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는데 과기처 모 인사가 이 가운데 2000만원을 다른 곳에 지출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남은 돈 8000만원으로 시스템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성기수 소장이 김봉일 부장에게 말했다. “이 돈으로 체전 전산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겠소?”

매사에 긍정적이고 추진력 강한 김봉일 부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미 시작한 일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죠.”

허채만 SERI 시스템 운영팀장의 당시 증언. “3개월 동안 직원들은 거의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시간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우리는 국내 최초로 체전 전산시스템을 개발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전산화 팀원들의 치열한 노력 끝에 체전 개막일에 맞춰 시스템을 개발했다. 제64회 인천체전은 1983년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인천공설운동장 등지에서 열렸다. 13개 시·도와 이북 5도, 6개 해외 동포 팀을 포함해 1만7548명의 임원과 선수가 참여했다.

인천체전은 우리나라 체전 사상 처음 모든 경기 진행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컴퓨터 체전'으로 불렸다. 대회 전부터 국내 언론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국민의 관심도 남달랐다.

경기 종료 즉시 경기 결과와 기록을 단말기에 입력하면 중앙컴퓨터가 자동으로 메달을 집계하고 종목별 득점을 계산했다. 기자들이 경기 현장에 가지 않더라도 단말기로 경기 결과를 알 수 있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전산시스템 가동 1호 기록은 10월 6일 오전 열린 배드민턴 남고부 대전 1회전 결과였다. 경기 종료 10여초 만에 경기 결과를 전산시스템에 송고했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부터 전산시스템은 대혼선을 빚기 시작했다.

원인은 사전 교육이 부족해서 심판과 경기운영 요원들이 경기 결과를 컴퓨터에 제대로 입력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과거 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컴퓨터 체전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했다. 전산 체전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비판도 거셌다. 그날 한 언론은 '컴퓨터 체전'이 아니라 '손퓨터 체전' '발퓨터 체전'이라며 비판했다.

조직위에 비상이 걸렸다.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이 긴급 지시를 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일부터는 컴퓨터 체전으로 진행하시오.”

전산화팀은 그날 저녁 심판과 운영요원 대상으로 철야 전산교육을 실시했다. 교육 결과는 이튿날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경기가 끝나면 즉시 결과를 전산입력 요원들에게 전달하고 입력과 동시에 대회 본부와 프레스센터로 전달했다. 모든 경기 결과는 경기 종료와 함께 신속 정확하게 집계했다. 과학 스포츠의 시작이었다.

노태우 위원장은 성기수 소장과 함께 현장에서 전산시스템을 점검했다. 노태우 위원장은 사상 첫 컴퓨터 체전에 감탄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건 과학기술이었다.

“인천체전 전산시스템이 100% 완벽하지는 않지만 3개월 만에 국내 최초로 이 정도 시스템을 개발했다면 이는 대단한 성공입니다.”

인천체전이 끝난 그해 10월 어느 날 노태우 위원장이 성기수 소장을 집무실로 불렀다. “인천체전 전산시스템을 기반으로 1984년 대구체전, 1985년 강원체전, 1986년 아시안게임, 1987년 광주체전을 통해 기술과 경험을 쌓는다면 우리가 획기적인 올림픽 전산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림픽 전산화를 맡아 주세요.”

애타게 기다리던 제안이었다. “알겠습니다. 매년 체전 때마다 시스템 향상을 위해 조직위에서 예산을 배정해 주십시오.”

1984년 6월 11일 정부는 오명 체신부 차관을 단장으로 한 제23회 LA올림픽 대회 현지조사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조사단은 6월 16일까지 현지에서 LA전산시스템을 자세히 돌아봤다. 오 단장은 현지를 돌아보고 “LA시스템 도입은 해법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오명 전 과학기술부총리(당시 체신부 차관)의 증언. “경기 하나가 끝나고 그 결과가 전산 처리해 나올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한 경기 전산 처리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경기장까지 말썽이 생겼다. 원인을 알아보니 LA올림픽 전산시스템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사용한 시스템을 사다가 약간 수정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무려 12년이나 된 낡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일이었다. 나는 우리가 LA시스템보다 전산시스템을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30년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7월 24일 오전 10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올림픽 전산화 참여 의사를 밝힌 국내 업체 기술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산화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SREI, 한국데이타통신(현 LG유플러스), 쌍용컴퓨터(현 쌍용정보통신), 한국전산주식회사(현 교보DTS) 등이 참석했다.

10월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서울 올림픽 전산화 사업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그 핵심은 올림픽 전산시스템을 외국에서 도입하지 않고 국내 기술로 개발키로 한 점이다. 국내 컴퓨터 업계는 두 손 들어 환영했다.

위원회는 △최신 기술 활용으로 과학적 대회 운영 △국내 과학기술 능력 과시 △전산 관련 기술사업 발전 △스포츠 과학화 전기 마련 등을 목표로 제시했다.

위원회는 올림픽 전산화 사업은 올림픽 대회의 성공적 운영으로 전 세계에 한국 과학기술 능력과 독창성을 과시함과 동시에 국가 경제 발전의 계기가 되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경기운영시스템은 SERI, 종합정보망은 한국데이타통신, 대회 지원은 한국전산주식회사, 대회관리시스템은 쌍용컴퓨터가 각각 맡기로 했다.

10월 20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올림픽직위원회는 청와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서울올림픽 전산화 사업 계획을 보고했다. 위원회는 이날 예산과 개별 사업 내용 및 올림픽 전산화 사업의 특수성을 감안해 기술 주관 기관을 지정하고 주관 기관 중심으로 올림픽 전산시스템을 개발해서 운영하겠다고 보고했다.

1985년 1월 SERI는 올림픽 전산화 개발팀을 구성했다. 팀장은 김봉일 부장이 맡았다. 안영경, 최경호, 권영범 등 최고 인재 69명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오명 전 과학기술부총리의 증언. “김봉일 박사는 개발팀을 마치 군대 조직처럼 이끌었다. 올림픽 몇 달 전부터는 아예 연구소에 매트리스를 깔고 연구원들과 숙식을 함께했다. 우리가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를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연구원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개발팀 연구실은 24시간 불이 꺼질 줄 몰랐다.

그해 12월 조직위원회는 전산화 작업을 책임지고 일관성 있게 수행하는 주관 기관으로 KAIST를 지정했다. KAIST는 이를 부설기관인 SERI에 위임했다. 이에 따라 SERI는 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전산화를 총괄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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