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선]반도체 장비 수출 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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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을 찾았다. 취임 후 첫 방미다. 한미가 논의해야 할 안건은 산적해있다. 그 중 특히 주목받는 것은 '반도체 동맹'이다.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어떻게든 막으려고 혈안이다. 중국이 첨단 반도체 칩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제조 장비 수출을 가로막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요 동맹국의 참여도 압박한다. 미국 첨단 장비 수출 규제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와 일본이 이미 손을 잡았고, 이제 우리나라 차례다.

미국은 자국 수준에 해당하는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한국에 요구한다. 한국에는 네덜란드 ASML처럼 첨단 반도체를 만들기 위한 핵심 노광장비(EUV)는 없지만, 원자층증착(ALD)·웨이퍼 결함 개선·감광액 제거·반도체 접합·계측 등 다양한 공정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한 장비가 많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세계적인 반도체 제조사를 고객으로 둔 덕분이다.

만약 미국의 수출 규제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국내 반도체 장비 업계에 미칠 영향은 만만치 않다. 미국이 블랙리스트에 올려둔 중국 기업은 고객사로 확보할 수 없다는 의미다. 수출 시 깐깐한 신고 절차나 사전 등록 등 규제에 발이 묶이면 시장 공략을 잃을 공산도 크다. 우리 입장에서는 커다란 시장을 놓치는 셈이다.

실제 미중 갈등 이후, 중국은 국내 장비사에 눈을 돌렸다. 도입이 까다로운 미국이나 선제적으로 동맹을 맺은 네덜란드·일본 대비 한국산 장비로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 쉬웠을터다. 반도체 장비 업계 관계자는 “중국 반도체 제조사가 한국 장비를 찾는 경우가 많아졌고, 실제 다수 장비사가 중국 매출 비중을 확대했다”고 말했다.

2022년부터 시작된 반도체 침체기는 이같은 현상을 가속화했다. 감산 등으로 국내 반도체 설비 투자가 대폭 줄어든 탓이다. 반도체 장비를 국내에 팔수 없으니 그나마 수요가 있는 중국을 찾았다. 중국 반도체 굴기를 돕는다는 비난과 기술 유출 우려를 뒤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이들에겐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반도체 장비 업계의 '활로' 중 하나는 분명 중국이다.

게다가 미국은 중국에 대한 첨단 뿐 아니라 범용 반도체 규제 카드도 만지작 거리고 있다. 이 경우 국내 장비사의 중국 진입 문턱은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안 장관은 미국에서 “기본적으로 동맹들과 같이 공조를 하는 것이 큰 방향”이라고 정부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대중국 규제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도체가 단순 산업을 넘어 정치·외교·안보의 전략 무기화된 지금, 동맹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시장도 무시할 순 없다. 우리 반도체 장비 산업과 기업의 악영향을 최소화할 동맹 전략을 고민해야할 것이다.

미·중 사이의 지난한 줄다리기임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건 시장 경제 속 수출 주권, 나아가 산업 주권이다. 우리 산업이 살아가야 할 방향은 우리가 주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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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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