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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우 동국대 AI융합대학장

중국 서진시대 학자인 곽상(郭象)은 독화론(獨化論)을 주장한다. 만물은 독자적으로 생멸변화(生滅變化)한다는 의미인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은 공통된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 간에도 서로의 연관이 전혀 없이, 모든 변화는 독자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철학 사조인 선진도가(先秦道家)에는 이러한 표현이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서로 간의 관계(關係)로 이루어진다는 사상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를 들어, 노자(老子)의 유무상생(有無相生), 주역(周易)에서의 음양(陰陽), 장자(莊子)의 기(氣) 등은 인구(人口)에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는 말들이다. 특히, 불교에서의 인연(因緣)에 대한 철학은 다른 사상들과는 달리 매우 치밀하며 심지어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보면, 세상에 융합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굳이 4차 산업혁명이나 소프트웨어(SW), 인공지능(AI), 이런 말들을 차치하더라도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 생멸변화치 않으며, 다른 모든 것들과 조화롭게 융화돼 이 순간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한 순간도 그 상태로 그 자리에 머물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며, 생멸(生滅)의 순환(巡還)을 이어간다.

이렇듯이, 우주 만물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영속적인 융합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개별적인 존재의 공간적, 시간적 경계(境界)는 어디에 있는가?”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 1장에서 경계의 모습을 묘사한다.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없는 것(無)이든 있는 것(有)이든 모두 가물(玄)어서, 그 의미가 매우 가물가물하니, 천지의 오묘한 만물(衆妙)이 들고 나는 문(門)이로다.” 쉽고 간단하게 말하자면, (항구적인) 경계(境界)라는 것은 없으며, 어느 한 순간 눈에 띄는 것 같지만, 얼마 전에만 해도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바로 얼마 후에도 그렇게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다.

급기야, 인간과 AI(기계든 소프트웨어든) 간의 경계마저 사라지고 있다. 위기이자 기회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앎과 모름의 경계 또한 각자의 마음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경계의 변화는 어제, 오늘 또는 금세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러스트벨트의 이야기가 있고, 철기시대에 중국 대륙에서는 천명(天命)으로부터 독립해 인간의 도(道)와 덕(德)을 추구하는 자주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가치를 부여한 바 있다. 과거가 이럴 진대, 우리는 이 시대를 마주하고 리드할 수 있는 방안을 스스로 모색해야 한다. 리더는 경계가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여 나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리더의 모델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장자(莊子)는 다음과 같이 해답을 제시한다. 오상아(吾喪我). 내(吾)가 나(我)를 죽인다(喪)는 의미다. 과거 어느 시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하면서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인 지적·이성적 능력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쌓여진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현재의 나(我)를 죽여야 한다. 장자는 조금 더 보탠다. 그럼으로써, 땅의 퉁소 소리와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며, 비로소 도(道) 즉, 우주의 원리를 꿰뚫을 수 있는 밝음(明)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를 응원한다.

꽃이 떨어져야 그 자리에 열매가 맺고, 또 그 다음 해에 더 우아한 꽃이 필 수 있듯이, 현재의 나를 죽임으로써 희미해진 경계를 넘어 새롭게 마주칠 미래를 위한 내가 태어날 수 있으며 과거보다 더욱 혁신된 나로 성장할 수 있다.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노력은 리더들의 몫이다.

이강우 동국대 AI융합대학장 klee@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