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디지털 창세기]〈15〉대화형 인공지능 GPT를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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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3대 사건으로 지동설(사람이 사는 지구가 우주,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다), 진화론(사람도 동물의 일종이다), 프로이드의 심리학(무의식이 사람의 삶을 지배한다)을 꼽는다. 인공지능(AI)이 사람을 넘어선다면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정도에 그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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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작가 이소연 作

대화형 인공지능(AI) 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성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GPT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역사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마음껏 누릴 자유를 주면서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이면 악으로 단죄했다. 과학기술은 사람의 자유를 키웠지만 자연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등 부작용도 가져왔다. 이게 옳을까. 인간중심주의는 한계에 왔다. 프랑스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은 논문 '기술적 대상의 존재 양식'에서 사람과 관계하며 삶을 표현하고 실현하는 기계에 대해 썼다. 기계 등 비인간 존재와 인간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전화교환국의 계기판은 전선·장비로 이뤄진 기계덩이에 불과하지만 통신망에 연결되면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의 삶을 풍부하게 한다. 우리는 기계를 통해 자동차·냉장고·TV 등 가전만이 아니라 통신·소셜미디어·모바일·메타버스 등 디지털 세계에 항상 접속해 있다. 인간의 성장과 함께 기계도 성장한다.

기계 등 기술적 대상은 단순 도구에서 시작해 기계나 AI로 발전하면서 생명·신체 안전에 대한 위협도 증가했다. 삶의 편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그 위험을 끌어들이고, 관리하면서 살고 있다. GPT 등 AI의 발전은 우리 인간의 삶을 급속도로 바꾸고 있다. 강의 자료, 문서 작성, 검색, 창작 등 GPT를 이용한 서비스가 늘고 있다. 반면에 데이터 수집 과정이 불투명하고,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으며, 거짓·편향된 결과를 제공할 위험도 있다.

GPT 등 AI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인간의 자유와 편리를 위해 무한정 이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보고 규제를 완화하자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사람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면 폐기하거나 당분간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모두 극단적이다.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기계 등 기술적 대상도 독립 개체가 되어 다른 것과 차이를 보일 수 있다면 행위자(actor)로 인정한다. 개체를 구성하는 원자 또는 정보 단위를 기준으로 할 때도 사람과 AI는 구분될 수 없다. 행위자가 누구인지보다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와 맺는 '연결 또는 관계(network)' 중심으로 의미를 찾는다. 생명체는 출생하면서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AI 등 기술적 대상은 개체화와 그 발전을 통해 존재하게 되고,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연결, 관계 맺음을 통해 인간은 AI 등 기술적 대상을 발전시키고 기술적 대상은 인간을 발전시킨다. 그것이 공존이다. 행위자들의 연결·관계를 합리적으로 규율하는 것은 법·제도와 윤리의 몫이다. 그것을 조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가능하고, 유일하다.

GPT 등 AI의 발명·창작을 법적으로 허용할지는 all or nothing 시각으로 여부를 보지 말자. AI의 핵심적 관여로 발명과 창작이 이뤄졌다면 그것을 인정하되 사람의 발명 및 창작과 공존하기 위해 어떤 다른 규율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이 숙제할 때 GPT 사용을 금할 것이 아니라 사용할 때 어떤 표기를 하고 어떤 기준으로 검증·평가해야 공정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GPT가 우리 일자리를 줄인다면 우리가 어떤 일자리로 옮겨갈지, 어떻게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지를 고민해야 한다. 약자를 위한 장치도 중요하다. GPT를 보이스피싱 등 범죄에 이용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다만 위협할 것이라는 막연한 이유로 AI를 막을 수 없다. 막히지도 않는다. 사람과 GPT 등 AI의 연결, 관계 정립과 공존을 위한 법·제도 패러다임을 빨리 구축해야 우리의 미래가 온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 sangjik.lee@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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