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Image
전두환 대통령이 80년 9월11일 수석비서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선서를 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80년 9월 3일.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오전 대통령 비서실 수석비서관 인사를 단행했다. 전 대통령은 경제수석비서관에 김재익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경제과학분과위원장을 발탁했다. 또 정무수석비서관실을 2개로 분리해서 정무 제1 수석비서관에 우병규 국회 사무차장(전 국회 사무총장), 정무 제2 수석비서관에 김창식 정무수석비서관(전 교통부 장관)을 각각 임명했다. 전 대통령은 자신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통해 김재익의 탁월한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그를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하고자 했다.

전 대통령이 그를 집무실로 불러 경제수석으로 임명하겠다고 말하자 김재익의 태도는 전혀 뜻밖이었다. '감사하다'는 말 대신 전 대통령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각하, 제가 생각하는 경제정책은 인기도 없고 또 기존 세력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만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제가 경제수석으로서 각하를 모시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자칫 역린(逆鱗)을 건드릴 수 있는 민감한 발언이었다. “조건이라니, 그게 뭐요?”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려면 엄청난 저항에 부닥칠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믿고 정책을 끌고 나가 주시겠습니까?” 전 대통령은 김재익을 잠시 쳐다본 뒤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이른바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막강한 경제수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하는데 전 대통령은 경제에 관한 권한을 김재익에게 일임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냉혹한 권력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 대통령은 이후 자신이 한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김재익을 신뢰하고, 그의 능력을 믿었다. 전 대통령은 김재익 경제수석이 추진하는 정책에 전혀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설혹 외부에서 경제정책을 비판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을 쓰면 믿는 것이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었다.

홍성원 전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의 생전 증언. “전 대통령은 어떤 일을 누구에게 맡기면 그가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힘을 실었습니다.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잘 모르는 분야에 관해서는 솔직하게 '내가 뭘 아나, 자네가 책임지고 잘해'라고 하셨습니다.”

그해 9월 11일. 전 대통령은 오전 9시 30분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 자리에는 김용휴 총무처 장관이 배석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실은 6개 비서관실로 구성했다. 과학기술, 금융, 재경, 산업, 자원, 국토개발 등이었다. 경제수석실 전체 인원은 27명이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은 최고 인재들이 모이는 인재 집합소였다. 그때 과학기술비서관은 오명 박사였다.

김 수석과 오 비서관의 만남도 드라마틱하다. 경기고와 육군사관학교를 18기로 졸업하고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오 비서관은 미국 뉴욕주립대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육사에서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 박사는 그곳에서 전자파를 이용해 땅굴을 찾아내는 장비와 포병 사격용 컴퓨터를 개발했다. 그러다가 1980년 5월 31일 국보위가 설치되자 상공자원분과위원으로 일했다. 오 박사는 위원회에서 전자산업 발전 방안을 마련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국보위가 해체되자 그는 국방과학연구소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해 9월 초 어느 날. 오 박사는 김재익 경제수석의 전화를 받았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전화였다. 두 사람은 서울 광화문 인근 한 한정식 집에서 만났다. 김 수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 박사가 국보위에서 컬러TV 시판과 방영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 박사 덕분에 시판은 허용했지만 컬러 방영은 안 돼 안타깝습니다. 빨리 컬러 방송을 시작해야 컬러TV가 팔려서 전자산업이 발전할 텐데.”

이날 대화는 전자산업 육성과 반도체 개발, 정보통신 산업 등을 주재로 밤늦도록 계속했다. 오명 전 부총리가 전하는 그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다.

◇오명 박사=정보통신산업은 미래 산업의 핵입니다. 앞으로 몇 년이면 개인용컴퓨터가 안방에서 서로 통신하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이와 함께 통신산업과 반도체 산업, 소프트웨어 산업이 동시에 발전할 것입니다. 한국은 전쟁으로 인해 산업사회로의 진입이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하루빨리 서둘러서 우리가 먼저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김재익 수석=그렇다면 당장 우리가 무엇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까.

◇오명 박사=우선 전화 적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온 국민이 편하고 저렴하게 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전화는 통신의 기본입니다. 여기에 컴퓨터 등이 결합하면 새로운 정보산업이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어느새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웠다. 헤어지면서 김 수석이 느닷없이 물었다. “함께 대화해 보니 나와 생각이 같군요. 어떻습니까, 이왕이면 청와대에 와서 말씀하신 일을 직접 해보지 않겠습니까? 직책은 약속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오 박사는 김 수석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오명 전 부총리의 말. “육사에서 교수 생활도 했고 연구소 생활도 했지만 공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김 수석은 내게 공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내가 본 가장 성실한 일꾼이기도 했다.”

오 박사는 그해 10월부터 청와대 경제수석실 2급 과학기술비서관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오 박사는 이듬해 5월 체신부 차관으로 임명받아 한국경제사에 한 획을 그은 정보통신 혁명을 주도했다. 한 통의 전화가 새 역사를 쓴 것이다. 김 수석은 동이 트자마자 사무실에 도착해서 온종일 관련 부처 관계자를 만나 설득하며 밤늦게까지 일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했고, 청와대를 청소하는 사람을 만나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과학기술비서관실 담당 분야는 과학기술, 체신, 전자공업, 방위산업 등이었다. 당시 과학기술비서관실은 정홍식 행정관과 홍성원 연구관 등이 근무했다. 정홍식 행정관은 연세대 재학 중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서 월남전에도 참전했다. 연세대 경제학과 3학년 재학 중 행정고시(10회)에 합격, 국무총리실과 청와대 정무수석실을 거쳐 1979년 12월부터 경제수석실에서 근무했다. 청와대 비서실 전입 순으로 따지면 그가 최고 선임이었다. 홍 연구관은 육사를 23기로 졸업하고 1년 동안 전방 소대장으로 근무한 후 미국 유타대에서 석사학위, 콜로라도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귀국 후 육사 교수로 있다가 1980년 국보위 상임위원장 비서실 파견 근무를 했다. 당시 전두환 위원장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비서실에서 전 위원장 일정 관리를 전담하면서 신임을 얻었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자 그는 중령으로 예편, 1980년 10월 말부터 청와대에서 연구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정 행정관과 홍 연구관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다. 이들은 환상적인 팀워크를 자랑하며 많은 과학기술 발전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한국 정보통신사에 이정표가 될 굵직굵직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 오늘날 정보통신 강국의 터전을 마련했다.

당시 경제비서실은 토론비서실이었다.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의 회고. “김재익 수석은 워낙 토론을 좋아했고 또 잘했다. 그분은 토론을 통해 경제비서실 직원들을 교육하려 했다. 토론 결과를 소관 업무에 반영하고, 청와대 밖에 나가서도 흔들림 없이 주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누구나 김 수석과의 토론에 항시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토론의 핵심은 항상 '왜'와 '어떻게'였다.”


과학기술비서관실이 소신껏 각종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전 대통령의 절대 신임을 받는 김재익 경제수석이 뒤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요체는 적재적소 인재 발굴과 권한 위임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