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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섭 과학기술처 전 장관이 과학기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96년 2월 10일 이수성 국무총리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고 있다.

1978년 12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오후 20개 정부 부처 가운데 과학기술처 등 11개 사회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대폭의 개각을 단행했다. 박 대통령은 또 9년 3개월 동안 자신을 보좌한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도 경질하고 후임에 김계원 주대만대사를 임명했다. 정부와 청와대를 대폭 물갈이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개각에서 7년 6개월 동안 재임한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을 교체하고 후임에 최종완 공업진흥청장을 발탁했다. 최형섭 장관의 재임 기간은 역대 최장수 장관 기록이다. 이 기록은 약 반세기가 지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최형섭 장관을 수식하는 말은 많다. '역대 최장수 장관' '한국 과학기술 전도사' '과학계의 대부' '대쪽 소신 장관' 등이다. 그의 소망은 관료가 아니었다. 외길 과학자로서 원하는 분야에서 평생 새로운 것을 연구개발하는 게 꿈이었다.

최 장관의 회고록 증언. “본래 행정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한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것이라고 하겠다. 과학기술처 장관 발령을 받았을 때도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더구나 그때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설립과 운영이 이제는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해 내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 온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은 직접제강에 관한 연구였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6월 3일 최형섭 KIST 소장을 2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발탁했다. 당시 그는 미국 출장 중이었다.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국제전화로 장관 임명 사실을 알았다. 최 장관의 생전 회고. “장관 임명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당황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장관 자리를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귀국해 그해 6월 15일 오전 박 대통령으로부터 지각 임명장을 받았다. 박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면서 최 장관에게 당부했다. “한국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시오.” “예, 각하. 그런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요. 자리에 앉아요.” 박 대통령은 최 장관이 자리에 앉자 빙그레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최 장관, 우리는 어렵지만 과학자는 얼마 동안 행정을 하다가 연구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최 장관도 2~3년 일하다가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시오.” “제가 각하께 드리려고 한 말씀도 그런 것입니다. 잘 알았습니다.” 최 장관은 이후 대통령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연구소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장관 취임 후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도 청와대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는 초조했다.

1975년 12월 어느 날. 박 대통령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 최 장관은 청와대로 들어갔다. 최 장관은 보고를 마친 후 '기회는 이때다' 싶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각하, 제가 장관직을 맡은 지 4년이 다 됐습니다. 이제는 KIST로 돌려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박 대통령은 말없이 집무실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럴 의사가 없다는 무언(無言)의 표시였다. 최 장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청와대를 나왔다.

이듬해인 1976년 초. 박 대통령이 과학기술처를 연두 순시한 후 장관실에서 차를 마셨다. 박 대통령이 최 장관에게 물었다. “최 장관, 과학기술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계획하고 실천해야 하며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늘 주장해 왔는데 지금도 그런 소신에는 변함이 없는 거요?” “각하, 그렇습니다.” “그러면 딴소리하지 말고 장관으로서 지금까지 추진한 과학기술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할 것 아니오.” 그러고선 박 대통령은 자리를 떴다. 최 장관이 지난해 말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에게 건의한 말에 대한 답변이었다. 다른 생각 말고 장관으로 계속 일하라는 뜻이었다.

최 장관의 술회. “나는 과학기술 개발은 일관성 있게 꾸준히 추진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늘 주장했는데 정작 이를 실천한 사람은 박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과학자로서 전공을 살리지 못했지만 이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한국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그런 의지를 가진 대통령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최 장관은 과학기술 입국을 향한 박 대통령의 절대 신임 아래 이를 구현하기 위해 소신껏 일했다. 우선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3대 정책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과학기술 발전 기반 구축, 전략기술 중점 개발, 과학기술 풍토 조성 등이다. 그는 과학기술 기반 구축을 위해 기술개발촉진법, 기술용역육성법, 국가기술자격법, 특정연구기관육성법 등을 제정했다. 또 과학기술 발전의 핵심은 인력이라는 점에서 인력개발 15년 계획을 마련했고, 한국과학원(현 KAIST) 설립에도 헌신했다. 최 장관은 행정직 위주인 과학기술처의 인사체계를 기술직 위주로 개편하고 실·국장을 기술직으로 교체했다. 그는 장관실을 늘 개방했다.

최 장관은 정보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해 과학기술처에 정보산업국을 신설했고, 당시에는 생소한 행정 전산화를 앞장서서 추진했다. 1975년 2월 17일. 과학기술처 연두순시에서 최 장관은 성기수 박사가 개발한 행정전산화 프로그램을 시연하며 박 대통령에게 “행정을 기계화하려면 전산화를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이 건의를 수용해 총무처 주관으로 행정전산화를 추진토록 지시했고, 이는 오늘날 전자정부 구축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7년 12월 5일에는 한국통신 혁명의 초석이 된 한국통신기술연구소(현 ETRI)를 발족했다.

최 장관은 과학기술 풍토 조성을 위해 전 국민 과학화운동과 새마을기술봉사단, 1마을1과학자 기술결연 등 활동을 전개했다. 또 과학기술 촉매제 역할을 하는 학술단체 활동을 지원하고,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현 한국과학창의재단)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를 출범했다. 1976년 9월에는 과총회관을 건립했다. 최 장관은 서울 연구개발단지에 이어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인 대덕연구단지를 조성하고 해외 과학자 유치에 앞장섰다.

최형섭 장관이 공직에서 물러나자 당시 이한빈 박사가 아주공대 석좌교수직을 제안했다. 이를 안 천병두 KIST 소장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연구소에도 석좌교수에 해당하는 연구위원제도가 있는데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까?” 최 장관은 드디어 소망하던 KIST 특수강연구실로 돌아갔다. KIST는 초대 소장이자 장관을 지낸 그를 각별하게 예우했다. 하지만 그는 솔선해서 연구계획서를 작성해서 연구수탁에 나섰고,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5년 동안 4억5000만원이란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장을 비롯해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한국과학원장, 유엔과학기술개발자문위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위원, 러시아과학원 외국회원 등으로 활약했다. 태국,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등 개발도상국들의 과학기술정책 자문역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그의 삶은 청빈했다. 장관 시설 박 대통령은 궁핍한 그의 생활 형편을 알고 집수리 비용을 보낸 적도 있다. 1994년 5·16민족상 과학기술 부문을 수상했지만 상금을 전액 KIST에 기부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최 장관은 2004년 5월 29일 별세했다. 향년 84세. 그가 남긴 재산은 작은 아파트 한 채가 전부였다.

이용태 당시 삼보컴퓨터 회장(현 박약회장)은 “남다른 카리스마와 열정, 추진력으로 과학기술계의 오늘을 만든 주역이며 과학계의 큰 별”이라고 추도했다. 정부는 최 장관의 생전 업적을 기려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과학자로는 이규태 박사에 이어 두 번째 현충원 안장이었다.


그의 묘비에는 '연구자의 덕목'이라는 5개 항의 글귀를 새겼다. 후배 연구인들에게 주는 애정 어린 성찰의 죽비였다. '학문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최 장관은 한국 과학기술인의 큰 스승이자 거울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