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별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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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별처럼 빛나는 순간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역사를 결정짓는다.”

100년 전 오스트리아 철학자 슈테판 츠바이크가 저서 '인류의 별의 순간'에서 남긴 말이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별의 순간'이란 단어를 인용하면서 새삼 화제가 됐다.

우리 현대사에도 극적 긴장감이 팽팽하던 운명의 순간이 많았다. 5·16 쿠데타, 12·12 군사반란, 6·29 선언, 3당 합당, DJP 연합 등 단번의 결정이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훗날을 좌우했다.

재계에도 강렬한 '별의 순간'이 있었다.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프랑크푸루트 선언'이 먼저 떠오른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발언은 지금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초일류 기업 삼성이 탄생하는 변곡점이었다. 이보다 앞선 운명의 순간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이 반도체 시장 진출을 전격 발표한 '도쿄 선언'이 그것이다. 일본 언론의 조롱이 쏟아졌지만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을 향한 40년 여정이 그 결정으로 시작됐다.

1973년 포항제철이 첫 쇳물을 쏟아낸 장면, 1976년 한국 최초의 독자 개발 자동차 '포니' 탄생 역시 별의 순간이었다. 단번의 결정이 기업과 한국경제의 운명을 갈랐다.

3년 전인 2019년에 우리 반도체 산업은 위기였다. 일본 수출규제로 반도체 공장이 멈춰 설 판국이었다. 일본은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터(PR), 플루오린 폴리이미드(FPI) 등 3대 필수 소재를 무기화했다. 역설적으로 그런 위협이 국산화에 눈을 뜨게 했다. 불화수소와 FPI가 단기간에 우리 손으로 개발됐다. 마지막 관문처럼 여겨지던 PR도 지난달 국산화 문턱을 넘었다. 불모지와 같던 핵심 소재시장에 샛별이 속속 탄생했다.

츠바이크는 '별의 순간'을 '찰나의 순간'으로 묘사한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지극히 짧은 구간의 시간에 몰린다. 마치 대기권의 모든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에 몰리는 것과 흡사하다. 그 순간 '예' '아니오'를 결정해야 한다. 결정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우리 반도체 산업은 일본 덕(?)에 그 순간을 맞았다. 미지의 문 앞에 다가섰다. 일본이 수십 년에 걸쳐 개발한 소재를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압축해서 개발했다. 응축된 에너지를 연거푸 발산할 후속 결단이 남았다.

열쇠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쥐고 있다. 이들이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은 시제품조차 만들 수 없다. '도쿄 선언'과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잇는 '소부장 강국 선언'이 절실하다. 너무 늦은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남는다.

마침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도 바뀌고 있다. '무어의 법칙'으로 대변되는 미세공정이 한계에 직면하면서 미국(장비), 일본(소재, 부품), 한국(제조) 등의 오랜 '국제 분업' 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초전력 반도체, 인공지능 반도체와 같은 차세대 반도체의 경우 '분업'보다 기획 단계부터 '협업'이 요구된다. 초일류 소부장 협력사를 갖춘 반도체 기업만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이 반도체 기업 유치에 팔을 걷어붙이고, 인텔이 다시 종합 반도체 기업으로 회귀한 것도 비슷한 흐름이다.

불멸의 예술 작품은 짧은 영감의 순간에 탄생했다. 세계 반도체 최강국에도 그 영감의 시간이 눈앞에 왔다. '별의 순간'은 흘려보내면 다시 오지 않는다.


장지영 부국장 jyajang@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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