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통령 선거가 4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유력 대선 후보 지지율이 초접전 양상을 보이면서 판세 예측이 쉽지 않다. 후보들은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연일 공약 발표에 여념이 없다. 공약 내용에 따라 표심이 움직이고, 기업이나 산업 관련의 경우 주가가 출렁이는 등 영향력이 엄청나다.
공약은 내용 발표도 중요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이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공약도 실천하지 않으면 공염불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정치권은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서 국민이 공약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되도록 했다. 오죽하면 '공약(公約)'이 아니라 '공약(空約)'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최근 벤처·스타트업계에서 벌어지는 '복수(차등)의결권' 논란을 보면 공약의 무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자에게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벤처기업육성법)은 벤처·스타트업계 숙원으로 꼽힌다. 이 법은 수년째 국회에 계류돼 있지만 지난 10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는 상정조차 하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강한 반발 때문이었다.
그런데 애초의 복수의결권 허용 추진은 민주당의 지난 총선 공약이었다. 민주당은 총선 2호 공약으로 '벤처 4대 강국 실현'을 이루겠다면서 비상장 벤처 창업주의 차등의결권 허용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주주 동의를 거쳐서 창업주에게 주당 의결권 10개 한도의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복수(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해 정기국회와 이번 1월 임시국회에서 벤처기업육성법의 법사위 통과를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민주당 의원들이었다.
공약을 온전히 믿는 국민이 많지 않다. 하지만 어떤 국민도 공약을 도리어 반대하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 측 논리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벤처기업에 실익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그렇다면 제도 도입을 원하는 벤처기업인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벤처기업협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차등의결권 도입에 찬성한다는 답변이 86.4%나 됐다.
반대 측의 또 다른 논거는 재벌이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제도도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악용 소지가 있다면 제도를 보완하면 된다. 더구나 벤처특별법은 주무 부처인 중소벤처기업부는 물론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부작용을 줄일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고, 법안에 반영했다. 막연하게 악용 소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취지나 필요와 관계없이 도입 자체를 막는 것이 더 불합리한 처사다.
복수의결권 제도가 우리나라만 도입하려는 특수한 제도도 아니다.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17개국이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스타트업과 기술기업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국가들이 복수의결권 제도를 쓰고 있다. 중국, 홍콩, 싱가포르 등도 2018~2019년에 복수의결권을 도입했다.
그럼에도 복수의결권 제도 도입에 의문이 든다면 민주당이 총선 2호 공약으로 발표할 때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당시 민주당은 복수의결권 허용으로 벤처기업이 경영권 약화에 대한 우려 없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를 통해 벤처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도 했다. 이는 벤처·스타트업계 생각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공약을 이행해야 한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