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성군을 꼽는다면 세종, 성종, 영조, 정조다. 재위기간이 길어 최소 20년이고, 50년을 넘기도 한다. 당나라 태종과 현종,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 등 중국 왕도 마찬가지다. 국가 창업 직후엔 왕과 공신 간 힘겨루기가 있다. 왕은 공신을 숙청하고 그 자리를 관료로 채운다. 정책을 수립·시행하고 감독하고 성과를 볼 때까지 왕의 자리에 있으니 과정에 시행착오가 있어도 쉽게 성군이 된다. 재위기간이 짧으면 일할 시간도 없고 관료에게 휘둘리기도 쉽다.
우리 대통령의 임기는 5년 등 대부분 짧다. 같은 당에서 대통령이 또 나와도 전임자를 이어받아 성과를 내는 분은 드물고, 자신의 브랜드를 입힌 새 정책을 원한다. 공무원에게 멋진 정책을 가져오라 독촉하면 공무원은 금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보고 단기에 성과를 볼 수 있는 정책 중심으로 내놓는다. 그래야 승진도 쉽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은 같다. 과학기술·정보통신·문화산업, 최근의 4차 산업혁명까지 다른 정책이 있었는가. 바로 경로의존성의 함정이다. 강한 외부 충격이나 상황 급변에도 관행에 따라 늘 해 오던 일만 하는 것을 말한다. 로고와 포장만 바꿔 유지된다. 정권은 임기 안에 새로 시작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을 원하지만 그런 건 없다. 그걸 아는 공무원은 장기적으론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일 듯한 숫자 중심 정책을 가져온다.
예를 들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내세우고 실제 시행하면 목표가 달성된다. 그런데 고용 예산을 배정하지 않아 신규 채용을 꺼리게 만든다. 전체 고용은 늘지 않고 청년 실업이 늘어 세대 갈등의 원인이 된다.
정권은 바뀌지만 공무원 조직은 사람을 바꿔 가며 영원하다. 정권의 취약성은 관료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 거기에 불을 붙이는 것이 직권남용죄와 감사원의 감사다. 뜻있는 공무원이 핵심 정책을 발굴해서 실행하려면 자기 본분만 다해선 어렵다. 산업과 시장이 융·복합하는 시대다. 다른 기관·부서 공무원에게도 이래라 저래라 해야 하고, 무리수를 둘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직권남용죄가 되고, 감사 대상이 된다. 적극 행정을 장려한다지만 이것저것 복잡한 서류를 꾸며서 소명해야 하니 불안하고 번거롭다. 차라리 정년까지 복지부동이 낫다.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굴려야 하니 복지안동이다. 직권남용죄를 없애자.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직무유기죄를 가중 처벌하는 것이 좋겠다.
TV홈쇼핑 정책·규제도 마찬가지다. TV홈쇼핑 이외에 인터넷, 모바일, 라이브방송 등 다양한 형태의 쇼핑채널이 등장해서 고객을 뺏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아직도 TV홈쇼핑은 생방송, 데이터홈쇼핑은 녹화방송을 고집한다. 생방송은 데이터가 아닌가? 데이터홈쇼핑의 TV 화면 크기를 규제하기도 한다. TV는 크고 작은 모니터에 불과하다. TV모니터로 유튜브, 넷플릭스를 보는 세상에서 단조로운 TV 방송을 누가 보겠는가. 기존 규제를 없애고 다양한 크기의 화면, 생방송, 애니메이션, 문자, 숫자 등 데이터의 융·복합을 활용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만들자.
공무원이 기대는 것은 슬프게도 국민이 아니다. 법이다. 법에 따라 정책·규제를 하라는 법치행정 원리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숨은 이유가 중요하다. 법이 있어야 예산이 나오고, 권한이 생긴다. 법은 누가 만들까. 국회다. 정부 법안은 절차가 까다로워서 국회의원을 통해 법을 만든다. 그래서 공무원은 국회 눈치를 본다. 삼권 분립은 옛말이다. 국회 권력이 중요하니 공무원이 많은 시간을 국회에서 보낸다. 안타깝다. 21세기 실권이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 미래 정책과 규제를 설계하면 좋겠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국가지식재산위원) sangjik.lee@bkl.co.kr